[슬로베니아 기초과학 현장-② 연구 연속성]
세계 과학자들, 왜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를 주목하나
일관된 경영과 과학정책‧‧‧합리적인 기술축적 연구시스템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는 연구 연속성이 뛰어나다.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연구활동을 기반으로 내부와 외부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정비돼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75세가 넘은 과학기술자가 연구소의 멘토 역할을 하면서 기관의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고, 국가 최고 수준의 이공계 대학생들과 밀접히 연계되면서 새로운 젊은피를 수혈받고 있다. 예산이 없어 오히려 연구의 질을 깊게 한다.

고도의 기술집약적인 첨단장비를 직접 만들어 연구소에는 깊은 기술적 노하우가 깔려 있다. 연구 속도가 느린 것 같이 보이지만, 제대로 노하우가 축적·활용되는 모습이다.

◆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에는 연구인생의 멘토가 있다

 

▲'과학자 멘토' 로버트 블링츠 박사. ⓒ2009 HelloDD.com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의 역사는 로버트 블링츠(Robert Blinc) 박사의 인생과 거의 맥을 같이한다. 연구소 역사가 60년을 넘었고 그의 연구 인생은 50년을 넘어섰다.

블링츠 박사는 응집 물질(condensed Matter) 물리 분야, 특히 유전체 분야에서 자기 공명 방법(NMR)을 이용해 물질 온도에 따른 상전이(Phase transition)연구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연구자다.

그의 현재 나이는 75세. 여전히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으로 여념이 없다. 웬만한 연구자들 보다 더 부지런하게 활약한다. 지금까지 5편의 사이언스·네이처지 논문을 비롯해 700여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블링츠 박사의 존재는 단순히 선배 연구자 그 이상이다. 슬로베니아 과학기술자들 연구인생의 멘토(Mentor)다. 그의 주변에는 늘 지혜를 얻으려는 연구자와 학생들로 둘러 싸여 있다. 평생 연구현장에 있었던 블링츠 박사에게는 뭔가 다른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과 확연하게 다른 현실이 그의 몸 속에 베어 있다. 풀리지 않는 기술적 난제를 거친 경험으로 극복하면서 얻은 지혜가 넘치고, 체계화되지 않은 노하우가 그의 존재 자체에 담겨 있다.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가 연구 연속성에 대해 자신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현장의 베테랑 연구원이 연구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그만큼의 노하우를 가진 베테랑 연구자들이 많이 모여 후배들에게 그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부한다. 연구자들이 나이가 들어도 은퇴한 이후에도 얼마든지 연구소에 남아 기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블링츠 박사는 슬로베니아 과학기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노후를 바치는 희생정신으로 모범을 보이고 있고, 이런 그의 실천적 메시지는 과학기술계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로 전파되면서 국가를 강하게 유지시키는 핵심 가치가 되고 있다.

◆정부, 연구소 직접적 영향력 적어‧‧‧기관장 임기 5년, 재임 가능

 

▲재임된 야드란 레나르치크 연구소장. ⓒ2009 HelloDD.com
슬로베니아 국가 연구소의 기관장 임기는 5년. 재임도 가능하다. 장관 임기는 4년이다. 정권이 교체돼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법적으로 기관장 임기가 교차돼 있다. 연구소 경영 연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에 5년으로 규정된 임기를 5년 이상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과거 13년, 12년 임기를 마친 연구소장이 눈에 띈다. 평균 재임기간이 7.5년으로 경영 연속성이 높다. 야드란 레나르치크(Jadran lenarcic) 요제프 스테판 현 연구소장 역시 최근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연임됐다.

연구소를 이끄는 기관장은 우리나라 출연연 기관장과 역할이 별 다를게 없다. 특유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연구소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조직 내에 스며들게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가치를 실제로 집행하는 데 있어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는 매우 안정적이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공간 확보, 연구청과의 소통 등 연구자들의 연구환경 개선이 경영의 초점이다. 기관장이나 정부 관계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슬로베니아의 정부출연연구소는 정부(과학기술부)와의 직접적인 관계 형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연구재단같은 슬로베니아 연구청(Slovenian research agency)이 연구 평가와 정책을 집행하는 주요 기관이다. 유럽의 과학기술위원회가 10~20년 앞을 내다 보고 정한 정책방향에 예산이 투자되고 연구자들이 참여한다. 슬로베니아 정부도 연구청이 전문성을 갖고 제시한 정책방향과 경영정보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과학기술 정책 가이드라인만 정한다.

최근에는 첨단기술 보유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지원 등 산업 인프라 투자와 연계를 주요 정책으로 삼고 추진 중이다.

※ 전임 기관장의 임기 Prof. Anton Peterlin, Ph. D., founder director 1949-1955 Karol Kajfež, 1955-1958 Lucijan Šinkovec, 1959-1963 Prof. Milan Osredkar, Ph. D., 1963-1975 Prof. Boris Frlec, Ph. D., 1975-1984 Prof. Tomaž Kalin, Ph. D., 1984-1992 Prof. Danilo Zavrtanik, Ph. D., 1992-1996 Prof. Vito Turk, Ph. D., 1996-2005

◆도제식 후계자 양성‧‧‧연계대학 걸어서 5분 거리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의 후배 연구집단 '루블라냐 대학'. 연구소와 바로 이웃해 있다. ⓒ2009 HelloDD.com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 20~30명의 연구그룹 리더들은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주 6시간만 대학생들에게 강연하면 교수로 인정받는다. 대학에서 월급이 나오고, 연구소에서도 월급을 받는다. 주로 슬로베니아 최고 수준의 대학으로 꼽히는 루블라냐대학 학생들을 가르킨다.

학생들은 좋은 연구시설 인프라가 갖춰진 연구소에서 직접 현장 연구경험을 쌓을 수 있고, 연구소는 큰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우수한 젊은 연구인력들을 발굴 할 수 있다. 학생들이나 연구자는 최고의 연구를 지향하기 때문에 우수한 이공계 선·후배 두뇌들이 애초부터 지식교류 관계를 맺어나간고 있는 것이다.

인구 200만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지만 손가락으로 꼽는 대학과 연구소 사이에서 최고의 효율적인 인재 육성과 연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는 동시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이 이해할 때까지 붙잡고 가르친다. 교수가 학생을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고 자주 토론을 벌인다. 권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연구중심의 학문 풍토가 잘 조성돼 있다.

◆돈 없어 못산다고?‧‧‧그럼 직접 만들지 뭐
 

▲연구소에서 자체 제작한 소형 NMR 장치(좌)와 나노표면 분석장치(우) ⓒ2009 HelloDD.com
"흔히 첨단장비를 도입하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연구소들이 이 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수십년 동안 쌓아온 장비제작 기술과 노하우가 있으니까요."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 한 연구자의 말이다.

요제프 스테판 연구소는 국가 연구소이지만 연구장비를 쉽게 외국으로부터 들여오지 않는다. 필요한 연구장비를 사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환경과 분위기다. 결핍의 상황이 '모든 노하우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도전정신을 오히려 자극한 측면이 있다. 웬만한 장비는 직접 만든다.

단지 돈이 없어서라기 보다 기술축적의 의미에서 연구속도가 더뎌도 장비를 직접 제작한다. NMR(핵자기공명)·나노과학 표면 분석장치(STM-AFM) 등의 장치를 구성하는 모든 핵심부품들을 개발하고, 그 과정에서 간단한 과학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교육용 장비도 손쉽게 만들어 사용한다.

특히 상업적으로 팔지 않는 연구장비의 경우에는 연구자의 연구 내용과 요구에 맞게 개량 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대역 주파수 변조 NMR probe 장비 제작이다. 기존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장비는 2.5MHz 주파수 선폭에서만 실험측정이 가능하지만 이것을 사용할 경우 10 MHz 선폭 영역의 물질도 온도 범위 4K에서 400K까지 측정 할 수 있다.

▲최근에 제작한 대형 NMR 장치. ⓒ2009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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