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특구 40년 대한민국 산업화 40년]⑥심화되는 탈(脫)대덕"대덕이 한국의 실리콘밸리인가?" 의문 늘어…정체성 위기 심화

 

 

대덕연구개발특구 전경. 설립 40주년을 맞아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 전경. 설립 40주년을 맞아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있다.
"원주를 배워라."

 

최근 혁신도시의 모범으로 원주가 자주 언급된다. 원주는 수십년간 '군사도시'의 상징이었다. 이런 원주가 '첨단산업클러스터'로 부상한 것은 의료기기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부터다. 의료기기 산업단지에는 지난 1998년 '원주 의료기기 창업보육센터'가 들어선 이후 지난해까지 111개의 의료기기 업체가 입주했다.

이런 의료기기 산업단지의 발전에 힘입어 원주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07년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인구 30만명을 돌파했다. 2030년에는 인구 5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주혁신도시와 원주기업도시가 그 힘의 바탕이 됐다. 원주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인구 3만명의 미래형 자족도시로, 원주기업도시는 의료산업을 기반으로 인구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구와 생산, 주거 기능이 어우러진 도시로 조성된다. 이 두 곳이 완료되면 5만5000여명의 인구가 추가로 유입될 것으로 원주시는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원주는 '배가 고프다'. 이렇게 원주가 의료기기 클러스터를 발돋움하는데 산파역할을 한 윤형로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공학을 배우려면 원주로 가야한다는 공식을 세우기 위해 뛰었다. 원주가 의료기기 산업의 심장역할을 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며 아직 할 일이 많다는 뜻을 피력했다

"수원이 부럽다."

지난 6월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 현장에서는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R5(모바일연구소)' 입주식이 열렸다. 삼성전자 경영진을 비롯해 자치단체장 등이 참석한 이날 입주식은 삼성전자의 첨단 R&D 시설이 수원에 둥지를 틀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다는 일종의 선포식이었다.

삼성디지털시티는 R5 가동을 시작으로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꿈꾸고 있다. 2010년 12월 착공해 2년6개월 만에 완공한 R5는 무려 지하 5층, 지상 27층(연면적 30만8980m²) 규모를 자랑한다. 삼성디지털시티에 다섯번째로 들어서는 종합 연구개발(R&D)센터로 그동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휴대전화 R&D 인력 1만여명이 이곳에 모이게 된다.

삼성디지털시티에는 삼성뿐 아니라 삼성SDI, 제일모직, 삼성정밀화학, 삼성코닝정밀소재 등 5개사가 참여해 13개 연구동을 신축한다. 이곳이 모두 완공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가면 국내 최대 규모의 R&D 집적센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구도 주목하라."

대전에 대덕밸리가 있다면 대구에는 '메디밸리(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가 뜨고 있는 중이다. 대구시와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은 29일 신약개발지원센터, 첨단의료기기개발지원센터, 실험동물센터, 임상시험신약센터 등 4개 센터의 준공식을 연다. 그리고 인근에는 한국뇌과학연구원이 내년 건물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는 신설되는 뇌과학연구원을 비롯해 한국기계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식품연구원 등 여러 출연연과 협력체계를 맺었다. 또 일부 출연연은 직접 분원 및 센터를 이곳에 설립한다.

40년의 역사를 맞고 있는 대덕특구지만 이제 과학기술의 중심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979년 대덕단지관리사무소 현판식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40년의 역사를 맞고 있는 대덕특구지만 이제 과학기술의 중심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979년 대덕단지관리사무소 현판식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대덕특구가 '한국의 실리콘밸리'인가, 혹은 대덕특구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물음표가 늘고 있다.

 

원주처럼 지자체와 열정을 가진 전문가가 의기투합해 10년 넘게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도시가 생기고, 수원처럼 대기업이 대대적인 투자로 R&D 시설을 유치하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전국의 지자체들, 특히 수도권 지자체들은 최근 수도권 규제완화 움직임에 힘입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대기업, 특히 R&D 시설을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민간기업 연구소들이 밀집해 있는 대덕특구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대덕특구는 40년 전 분산된 연구소들을 한곳에 모으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여야 시너지가 커진다는 것. 연구소들을 한 곳에 모아 연구기능과 성과를 극대화하자는 취지다. 국가적 차원에서 고급두뇌의 집적화를 통해 시너지를 창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당시 가내수공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개편하자는 것이 대덕연구단지 조성의 목표였다.

이러한 '집중화'를 통한 목표는 적중했다.세계를 놀라게 한 기술들이 나왔고, 국내 산업화를 촉진하는 기술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집중화' 전략으로 대덕특구가 탄생한 지 40년만에 우리나라는 IMD 과학경쟁력에서 세계 7위에 올랐다. 국가 총연구개발 투자액도 세계 7위,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3위를 차지한다. 

대덕특구는 지금도 국내 최대의 연구개발 및 지식 집적단지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현재 출연연 30개, 공공기관 11개, 국공립기관 14개, 교육기관 5개, 기업 1360개 등이 입주해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6만3000여명에 달하고 최고의 고급두뇌로 불리는 공학박사만 1만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외형상의 수치에 불과하다. 2000년대 이후 탈대덕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출연연 시설이나 인력이 속속 빠져나가고 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은 제주도에 대규모 신재생에너지 연구기지를 설립했고,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은 1992년부터 광주와 부산, 오창 등 전국에 지역센터를 만들어 본원과의 역할을 분담해 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도 전북 정읍에 방사선과학연구소를 운영중이며 한국화학연구원은 울산정밀화학센터에 지원센터를 만들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는 2000년대 초반부터 광주 광통신연구센터, 대구 임베디느 SW연구센터를 운영하는 등 대부분의 출연연이 대덕 이외의 지역에 분원이나 센터, 연구시설 등을 설립했다.

연구개발특구 역시 대덕에서 지금은 광주, 대구, 부산 등 모두 네 곳으로 확대됐다.

대덕특구 설립 초기 '집중' 전략에서 '분산' 정책으로 방향이 선회된 것이다. 출연연이나 연구개발특구의 전국 분산 정책에 대한 견해는 엇갈린다. 투자와 인력을 더욱 집중시켜야 해당 지역의 특성화 전략에 맞춘 R&D전략이 필요한 만큼 대덕에서 축적한 노하우와 경험을 전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긍정적인 견해와 함께 세계적 혁신클러스터 조성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집중과 선택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반발 여론이 거세다.

문제는 이러한 분산이 R&D나 기업육성 등 정책적·장기적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단기적 방안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 출연연 관계자는 "분원이나 센터를 다른 지역에 만들려면 건물 뿐 아니라 장비도 새로 구입해야 하고, 인력도 보내야 한다. 연구원 입장에서 보면 한곳에 있어야 더 효율적인 운영이나 연구개발 활동이 가능하다"며 "그런데도 지역에 분원이나 센터를 만드는 것은 R&D 효율성이나 기술사업화 측면보다는 결국 정치적, 지역적 논리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어떤 지역에서 지자체장이나 국회의원이 마음먹고 연구원 유치에 나서면 사실 이러한 요구를 그저 외면만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지난 1월 열린 연국개발특구 신년인사회. 대덕의 다양한 종사자들이 대덕 40주년을 맞아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자고 뜻을 모았지만 가시화된 움직임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1월 열린 연국개발특구 신년인사회. 대덕의 다양한 종사자들이 대덕 40주년을 맞아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자고 뜻을 모았지만 가시화된 움직임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덕특구가 갈수록 동력과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은 '출연연의 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이 이미 '정부출연연'에서 '민간기업'으로 이동했다는 진단도 나온다. 이미 국가 R&D의 70% 이상을 민간에서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은 생존을 위해 R&D 예산과 시설, 인력을 늘리고 세계적 기업들과 경쟁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정부의 예산을 받아 운영되는 출연연에서는 최근 눈에 띄는 연구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면 국내 R&D 예산과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 해야 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온다. 지난 201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R&D는 총 49조8904억원으로 세계 6위, GDP 대비 연구개발비도 4.03%로 OECD 가운데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핵심 원천기술은 여전히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부분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출연연과 국가 R&D 구조를 개편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출연연의 '노화현상'도 심각하다. 기관마다 연구원 평균연령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20∼30대 연구원 비율이 급격히 줄고 50대 이상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2000년 이후 10년간 출연연의 20∼30대 연구원 비율은 65.5%에서 37.7%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으며 40∼50대가 34.5%에서 63.2%로 증가했다. 과학기술계 출연연의 2013년 연구원(정규직) 평균연령은 43.6세로, 지난 2010년 42.5세에서 1세 가까이 많아졌다.

연구원의 이직, 특히 대학으로의 이직은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지적되는 단골메뉴로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다. 기초기술연구회 산하 출연연만 기준으로 할 경우 최근 5년간 이직자는 281명이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2명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3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덕특구는 2000년대 초반까지 약 30년 동안 국내 유일의 과학기술클러스터로 자리매김해 왔다. 국가 R&D를 위한 시설과 장비, 인력이 대부분 대덕특구에 집중됐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사실상 전국 전역에 과학기술, 혹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복합단지가 생겨나고 있다. 저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도 진행중이다. 국가적·정치적·지역적 상황도 더 이상 '대덕'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 대덕 내부에서도 '위기'가 자주 언급된다.

최근 열린 '대덕의 위기, 허심탄회 토론회'에서 엄영준 썬에어로시스 전무는 "대덕은 10년 전부터 이미 위기였다. 상용기술은 기업에 밀렸지만 출연연은 변화가 없었다"면서 "이제와서 위기를 인식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자리에서 문형철 대덕과우회 전문위원은 대덕의 위기가 출연연의 위기와 직결된다고 전제하면서 "냉정하게 보자.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도 출연연 모두 과거 향수에 젖어 있고 그것을 요구한다. 정부가 출연연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연구소 내부는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출연연 관련 정책은 80년대 후반 민간연구소가 많이 생기면서 언급됐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정부가 국가 과학기술 추동력을 출연연에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덕 40년 어디로 가야하나' 주제로 열린 또 다른 토론회에서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위원은 "대덕이 세계적인 클러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정주환경이 중요하다. 연구자들이 좋아하는 생활환경과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외국 우수인재들이 오고싶어 할 것"이라면서 "대덕에는 외국연구인력을 위한 지원기관이 없다. KAIST 학생들도 졸업하면 다 본국으로 돌아가버린다. 남아서 일할 수 있는 정주환경과 일자리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공공연구노조도 대덕특구 40주년을 맞아 28일 성명을 내고 "대덕특구를 하나의 생태계로 비유할 때 활로는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대덕특구라는 생태계에서 우점종을 차지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지금처럼 그저 살아있는 화석으로 남아있는 한 대덕특구는 더욱 불모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이들은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조직구조, 운영방식, 주인의식으로 충만한 구성원이다. 대덕특구 40주년인 오늘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다양한 조직구조와 운영원리에 대해 정부출연연구기관 종사자들에게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한편 자신들의 미래를 전적으로 책임지게끔 맡겨두는 일"이라고 밝혔다.

한 원로과학자는 이처럼 대덕의 위기와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제는 대덕이 한국 과학기술의 중심인가, 대덕이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며 "지난 40년의 투자와 성과에만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대덕특구의 성장동력을 찾고 만들기 위해 국가, 지자체, 출연연, 기업, 대학 등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대덕의 위기가 여전히 먼 나라 얘기로만 듣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며 "다른 누구보다 대덕의 종사자들, 대덕에서 생활하고 있는 공동체가 주인의식을 갖고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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