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헌·백명현, 박동호·윤정한, 김장주·이공주 교수 인터뷰
공통된 가치관과 상대 재능에 대한 인정으로 함께 성공

아인슈타인의 부인이었던 밀레바는 남편 못지않은 수재였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의 홍일점이었던 밀레바는 수학에 관해선 아인슈타인보다 한 수 위였다. 일부에선 밀레바가 특수상대성이론 형성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 분석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세탁과 식사, 청소 등을 아내의 조건으로 내세우며 밀레바에게 평범한 가정주부를 강요했다. 두 사람은 별거를 거듭하다 15년 만에 파경을 맞았고, 과학사에 밀레바의 이름은 등장하지 못했다.

동시대를 살아간 과학자 부부로 퀴리 부부가 있다. 물리학과 결혼했다던 노총각 피에르 퀴리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마리 퀴리를 만나 마음을 바꿨다. 그는 아내에게 "우리 두 사람이 마음속에 인류와 과학을 사랑하는 같은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라며 평생 함께 연구를 해나갔다. 두 사람은 최초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부부가 됐다.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가진 남녀가 만났지만 결과는 달랐다. 부부가 같은 분야에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마음의 병이 되고,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되었다.

최근 과학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과학기술인 부부의 숫자도 늘고 있다. 지난 2010년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과학과 공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의 25% 이상이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배우자를 두고 있으며(1990대 20% 수준), 연구소에서 과학자 부부를 '함께' 고용하는 비율도 13%로 급증했다(1970년대엔 3% 수준).

이들 모두가 퀴리부부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순 없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학 연구의 길을 이해해주는 동반자가 있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지지 않을까? 혹은 보다 행복한 과학기술인들이 많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탁월한 연구업적으로 국내외에서 인정 받는 석학 부부들을 만나 함께 연구의 길을 성공적으로 완주할 수 있었던 비결을 들어봤다.

◆ 서정헌·백명현 교수, "실험짝이 평생동반자로…혼신의 연구인생 후회는 없다"

"화학은 조를 짜서 실험을 하는데, 학부 2학년 때 둘이 실험 짝이 됐어요. 화학실험은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 과정이거든요. 그거 같이 하다가 평생 짝이 됐죠."

1967년 3월, '신동'이며 '천재' 소리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전국의 수재들이 서울대 화학과에 모였다. 그 중 여학생은 단 3명. 바이올린으로 음대를 가려다 집안의 반대로 화학과에 진학한 백명현 한양대 석좌교수가 그 중 하나였다. 동기들 모임에서 언변이 뛰어나고 우스갯소리를 잘해 리더십을 발휘하던 서정헌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화학계의 대표 석학 부부가 탄생했다. 인공효소를 이용한 바이오테크놀로지 분야 권위자인 서 교수와 신물질 개발과 전이금속 분야 세계적 석학인 백 교수는 부부 최초로 모두 한국과학상을 수상했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1호 정회원 부부이기도 하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시카고대학(The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유학, 서울대에 부임한 것까지 거의 40년을 낮이고 밤이고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는데, 집에선 화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만큼 일에 있어선 각자의 길을 존중한다. 학문 분야가 같다보니 혹시나 서로의 논문에 무임승차 했다는 오해를 받을까 싶어 거리를 뒀고, 그러다보니 완전히 다른 세부 전공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부부가 모두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갖고 있어도 대개 한 쪽, 특히 여성과학기술인은 상대적으로 가사와 양육을 신경쓰느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기가 힘든데 백 교수는 성별 구분이 의미없는 탁월한 연구성과를 냈다.

첫 번째 비결은, 서 교수가 양육 부분을 주로 맡아준 것. 부부는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다. 첫째는 미국 유학시절 낳았고, 첫째와 10살 터울의 둘째·셋째는 귀국 후 교수가 되고 5년 후에 낳은 쌍둥이다.

아이 셋을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서 교수는 부드럽고 자상한 양육법으로 세 아이들과 '놀아줬다'. 요즘 유행하는 친구 같은 아빠 '프렌대디(Friend+Daddy)'였던 셈. 아이들이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놀이공원이며 연극이며 함께 문화생활을 즐기고 시험 일정도 꼼꼼히 기억해 부족한 공부를 직접 도와줄 만큼 아이들을 잘 챙겼다. 아이들은 당연히 진학이나 고민들을 서 교수와 상의했고, 여전히 "최고의 아빠"로 인정해준다.

그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내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며 "골프나 테니스를 안 하고 그 시간을 모두 아이들에게 썼다"고 말했다.

두 번째 비결은 역시 서 교수의 노력이다. 가사를 맡았던 서 교수는 "잠을 한 번 실컷 자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며 "매일같이 새벽 2시 이후에 자서 5시 반에 일어나는 강행군이었다"고 젊은날을 회고했다.

"사실 첫째를 낳고 공부와 아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죠. 그때 결국 학업을 택하고 아이를 잠시 한국으로 보냈는데, 마음이 매우 아팠지만 학문은 거의 내 생명만큼 소중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 뒤로는 평생 단 한 번도 '그만두어야 하나'를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육아와 출산은 여성들에게 힘든 일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서 남자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부가 한국에 왔던 1977년 당시 국내 대학들은 연구비, 기자재, 시설, 대학원생 등 무엇하나 갖춰지지 않았던 황무지였다. 실험이 필요한 분야였기에 어쩔 수 없이 기자재는 필요했으므로 장비가 있는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고, 청계천에서 유사한 기계와 부품을 구해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말 그대로 발로 뛰는 교수였던 것. 하지만 두 사람은 유학을 떠날 때부터 항상 귀국을 염두에 뒀고, 미국에서부터 한국에서 어떠한 연구를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서 교수는 "국내 연구 상황이 열악하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우수한 두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진행했다"며 "저비용으로 틈새시장을 노릴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을 공략했다"고 연구 비법을 소개했다.

백 교수 역시 "과학은 국제적으로 이름이 있어야지 절대 국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환경이 어디에 속해있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논문을 내는 것이 목표였다"며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분야에 무조건 도전한 것이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연구성과를 내놓는데 주효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려운 시기에 연구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만족한다"며 "연구의 자율성 부분에선 오히려 지금보다 여건이 좋았으므로 정말로 연구자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부부는 모두 정년을 마치고 의무와 굴레에서 벗어났다.

백 교수는 "나의 에너지를 100% 쏟아 부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구했고, 과학자로서 목표했던 꿈은 이루었기에 후회가 없다"며 "지금의 젊은 연구자들은 새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또 과학계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강조하는 풍토가 사라져야 후배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 역시 "과학을 하면서 놓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은퇴가 있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개인적인 종교 공부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 박동호·윤정한 교수, "생계 위해 청소·서빙…연구직은 인생의 선물"

박동호 한림대 명예교수는 1968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몇몇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던 유학은 집안사정에 발목을 잡혔다. 홀어머니 슬하에 함께 자란 형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 독일 유학중이었던 것.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금성사(현 LG전자)에 들어가 집안의 경제적 가장 역할을 수행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꿈은 커져만 갔다.

그때쯤 윤정한 한림대 교수 역시 머릿속이 유학 생각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전쟁둥이였던 윤 교수는  학창시절 성적이 우수한 학생 중 하나였으나 특별히 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집안 형편이 윤 교수를 대학원에 보내기엔 넉넉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막상 졸업 후 모교에서 영양사로 일하기 시작하자 계속 학문적 호기심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마음속에 불타올랐다.

1973년 봄, 현실적으로 유학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차선책으로 모교 대학원에 진학한 윤 교수 앞에 해결사처럼 박 교수가 나타났다. 양가 친척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알면 알수록 비슷한 부분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원 진학에 대한 꿈이 같았다. 결국 시기만 엿보고 있던 두 사람은 박 교수 형의 귀국일자와 대학원 입학허가가 결정되자마자 결혼, 두 달 만에 미국유학을 떠났다. 무일푼, 열정만 가득했던 신혼부부의 목적지는 캐나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쪽 땅, 미네소타 주립대학(University of Minnesota)이었다.

"사실 제가 결혼으로 아내의 유학을 도왔던 게 아니라 오히려 아내가 구세주였죠. 본인은 아직 대학원 입학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영양사 취업비자로 가서 생활비를 벌겠다고 했어요. 병원 주방에서 환자 급식을 돕는 일을 했는데 출근시간이 빨라 새벽 5시 반쯤 집을 나섰죠. 무릎까지 눈이 쌓인 길을 함께 걸어 직장에 데려다줬는데 어떤 날은 눈도 못 뜨고 저만 잡고 따라오더라고요. 젊었고, 1년뿐이었고, 희망이 있어서 할 수 있었죠."

박 교수의 표정과 눈빛에서 아련하게 그때의 미안함이 떠오르자 윤 교수가 덤덤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학 갈 때 항공료도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 7명을 에스코트해서 충당했어요. 당시에 그렇게 가면 항공료가 무료였거든요. 가서는 실험실 동물 우리 청소도 했고, 일식집 주방 보조도 했죠. 병원에서 큰 손수레에 음식을 잔뜩 싣고 나를 때의 엄청난 무게감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렇게 1년쯤 일하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돈 걱정 없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를 한다는 사실 자체로 매우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 경험들이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제 일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윤정한 교수가 대학원에 진학해 그 어느 때보다 신나게 공부에 몰두할 때쯤, 박동호 교수는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떠오르던 신뢰성 분야에 꽂혀있었다. 신뢰성 분야는 기계시설이나 소재부품의 수명을 예측하는 학문으로 플로리다주립대(Florida State University)의 프로샨(Proschan) 교수가 최고 권위자였다.

"1978년 아내를 북쪽 끝에 두고 혼자 남쪽 끝으로 왔죠. 그것이 제가 평생을 추구한 학문으로의 입문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매우 큰 행운이었는데 신혼이었던 아내와 4년이나 떨어져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게 지내게 됐죠. 서로 암묵적으로 '이제 절대로 떨어져 지내지 않겠다' 생각했고 이후에 우리 두 사람의 직장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떨어져있는 기간 동안 윤 교수 역시 평생을 몰두할 새로운 학문을 찾았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분자생물학을 영양학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 박사후연구원 시절에는 분자생물학 실험방법을 익히기 위해 박사 과정 학생들의 심부름까지 해줄 정도였고, 광범위한 기초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았다.

한층 성장한 두 사람은 4년 만에 네브래스카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만나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발한 연구를 펼쳐갔다. 박 교수는 그 어렵다는 종신교수(tenure)를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따냈고 윤 교수는 학회에서 발표를 맡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 귀국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박 교수 형의 갑작스런 별세였다. 윤 교수에겐 미국에 남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함께 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박 교수와 같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서 종신교수를 받은 박 교수였으나 당시 국내엔 신뢰성 이론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은 부부가 한 직장에 있는 것에 대해 미국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탓에 두 사람을 동시에 받아주는 대학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쌓은 국제적 연구업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수한 연구진을 찾고 있던 한림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알아보고 교수직을 제안했다.

박 교수는 귀국을 한국에 신뢰성이론을 알릴 기회로 삼았다. 그는 "우리나라 제조물품을 유럽 등 해외에 수출하려면 신뢰성 인증을 받아야 한다"며 "1990년대 후반, 수출을 늘려가고 있던 정부에서 이를 간파, 신뢰성 기반구축사업을 시작하며 많은 발전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9년 한국신뢰성학회를 주도적으로 설립, 국내 학자들의 국내외 연구교류 기회를 마련했다.

미국의 잘 갖춰진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윤 교수는 맨땅에서 실험실 여건을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매주 월화수목금금금이었고 밤낮도 없었다. 대학원생이나 박사후과정 연구원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서 학부생들을 양성해 그들을 고급인력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부족한 인력은 본인이 1인 2역, 3역까지 직접 맡았다.

두 사람이 귀국 직후, 아직 국내 실험실 연구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무렵, 부부는 방학만 되면 미국에 있는 전(前) 연구실에 가서 실험을 하곤 했는데 윤 교수는 돌아올 때면 자비(自費)를 탈탈 털어 연구 장비와 시약을 사왔다. 때론 꽤 크기가 큰 장비를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창고에 실어야 한다"는 비행기 승무원들과 "깨지기 쉬운 장비라 차라리 내가 창고로 가고 장비를 객석에 실어달라"고 애원하는 윤 교수의 실랑이가 계속되기도 했다.

컴퓨터 외엔 별다른 실험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던 박 교수는 가끔 아내의 행동이 과하다 생각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새벽 비행시간에 맞추기 위해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실험실 냉동고에 저장해 놓은 세포배양용 송아지 태아 혈청을 찾으러 다녀온다거나, 어렵게 구한 연구장비가 혹시나 깨질까봐 옷으로 둘둘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연구자로서 그 정성과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수입의 많은 부분을 연구에 필요한 경비로 쓰고 있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최상의 상태로 시약을 가져오느라 마지막까지 냉동고에 넣어놨다가 새벽에 바쁘게 움직였거든요. 늘 피곤한 몰골로 많은 짐을 들고 다녔으니 누가 절 연구하는 사람으로 봤겠어요. 그런데 그땐 집안 살림보다 실험실이 더 중요했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월급을 거의 다 연구 장비나 시약 사는데 썼어요. 그 덕분에 이후에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으니 후회하지 않아요."

이러한 노력 끝에 힘든 환경 속에서도 국제적 저명 학술지에 실릴 논문들이 나왔고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윤 교수는 "기회를 줬던 한림대와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한 연구비 등이 있어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고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퇴임한 박 교수는 여전히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개인적인 연구보다 신뢰성 분야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 그는 "신뢰성 분야의 교육과 연구 분야의 인력양성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며 "국제교류와 공동연구를 지원하고 연구인력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목표를 소개했다.

정년을 한 학기 남겨둔 윤 교수에게는 요즘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들어온다. 현재 해오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지만 퇴임 후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볼 생각이다. 그는 "내가 쓴 논문들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여했을까를 생각하면 조금 허무하고 아쉬울 때도 있다"며 "퇴임 후에는 겉으로 보여지는 성과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생각"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는 부부에게 마지막으로 함께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부부가 입을 모아 이야기 했다.

"서로 연구하는 분야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은 주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로 간에 욕심도 많고 직장생활도 충실해야 되기 때문에 가끔은 의견 충돌도 있었죠. 하지만 서로의 노력을 가장 잘 알고 있어서인지 상대방이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자신의 성취보다 더 기뻐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특별한 내조나 외조는 없었지만 서로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이해해주는게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 김장주·이공주 교수, "연구 30년 해보니 점점 더 재밌어"

김장주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와 이공주 이화여대 약학과 교수는 1976년 서울 종로에서 지인들 무리에 섞여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그 날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아 종로에서 서울역까지 둘이 걸어가게 됐는데,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의 길은 결코 나뉘지 않았고 40년 가까이 함께 걷게 되었다. 열정 넘치는 동갑내기 과학도였던 두 사람은 분야는 다르되 유사한 흐름과 속도로 성장해 현재 각자 분야의 석학이 되었다.

김장주 교수는 대학 진학은 화학공학과였으나 거시적인 화공보다 섬세하고 정밀한 재료공학에 큰 재미를 느껴 박사 학위 시 전공을 바꿨고, 유기전자공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엔 학계의 한계 추정치를 뛰어넘는 고효율․고성능 OLED(Organic Light Emitting Diodes:유기발광다이오드) 소자를 개발해 관련 연구기관과 기업들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화학을 좋아하는 약대생' 이공주 교수는  외연을 넓혀 대학원 때부터 생명, 미생물, 화학 등이 결합된 생화학을 전공, 프로테오믹스(proteomics:단백질체 분석기술)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됐다. 또 그는 여성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구축 분야에서도 리더십을 인정받아 아시아 최초로 세계여성과학기술인네트워크(INWES)의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웃는 모습까지 남매처럼 닮은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많았지만, 특히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특히 이 교수가 학문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여성의 일'에 대한 부부의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저는 항상 제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그 부분을 잘 이해해줬죠. 오히려 본인은 부인이 하루 종일 집에서 자기만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어요. 사실 저희 세대에서 그런 가치관을 가진 남자들은 많지 않았는데 말이죠.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해요. '남자들 외모와 경제력 소용없어. 네가 똑똑하다는 걸 인정해주고 지원해주는 게 제일 중요해'라고요. 남자들은 대부분 능력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지만 여자들은 환경의 영향도 매우 크더라고요. 가족들의 인정과 배려가 성공을 위한 첫 단추예요."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오히려 스스로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가족 중 누군가가 힘들어 했으면 저도 그만두라는 말을 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바쁜 와중에서도 아이들 아침 저녁 꼬박꼬박 챙겨주었고, 이 사람이 어떻게 하였는지 아이들도 건실하게 잘 컸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의와 연구를 잘 한다고 하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반면에 저는 이 사람에게 특별하게 해 준 것이 없으니 저야 말로 결혼 대박을 터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스탠포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로 떠났고, 1985년 3월, 유학 중 낳는 첫 아이는 부부가 함께 키웠다. 유학생 부부가 감당하기엔 미국의 아이돌보미 비용은 너무 비쌌다. 한 사람은 새벽같이 학교에 다녀오고 다른 한 사람은 늦게 출근하여 일하고 오는 방향으로 시간을 조절, 돌보미에게 맡기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김장주 교수는 "지나고 나니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아이와의 첫 눈 맞춤, 하나씩 늘어가는 행동과 애교를 목격하는 즐거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공주 교수는 일하는 여성으로서 출산이라는 첫 난관을 남편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넘겼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가 왔다. 1987년 박사후과정을 마치고 동반 귀국을 했는데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부임한 김 교수와 달리 이 교수는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도 다른 대우를 받았다. '박사후과정'이라는 비정규직을 제시받은 것. 여성후배들에게 나쁜 선례를 남길 것 같아 입사를 포기했지만 곧 같은 이유로 생각을 바꿔 입사했다. 잘하는 모습으로 여성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후 1년을 강의 등을 하며 지내던 이 교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입사해 다시금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부부는 1994년 이공주 교수가 먼저 모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김 교수 역시 1997년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로 부임하여 주말부부로 바뀌게 된다. 2003년 김교수가 서울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공주 교수와 김장주 교수에게는 또 한번 힘든 시기가 된다. 이 교수는 "교수라는 자리는 부임 후 2~3년이 힘들다"며 "새 강의록 작성, 실험실운영, 대학원생 훈련, 과제제안서 작성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데 혼자서 애들까지 돌보아야 해서 정말 바쁘게 보낸 시기였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새로운 연구환경을 꾸려야 했던 김 교수 역시 쉽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 후에 세 개의 기관에서 세 번 실험실을 꾸며야 해서 힘든 시간이었다"며 "다행히 세 기관 모두 주변에 있는 분들과 학생들이 많이 도와주어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도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돈독한 동료애와 부부애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거리두기'다.

이 교수는 "학문적으로 아예 다른 분야다 보니 학술적으로는 서로 크게 도움이 안 되지만 실험, 강연, 학회 등 학자가 해야 하는 일상적인 활동들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서로 중요도를 잘 이해해주고 있다"며 "너무 같은 분야면 은연중에 서로 비교될 수 있으니 우리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최근 재료 쪽에서 생물이 중요한 분야가 되면서 생물 분야로 진출하는 재료분야 교수가 많아 졌다"며 "제가 그럴 의사가 있었다면 진출이 상당히 용이하였을 테지만 굳이 집에서까지 전공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꺼려져서 생물분야 연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입을 모아 "30년을 넘은 지금, 연구가 제일 재밌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두 사람은 연구철학은 물론 사회문화에 있어 여전히 공통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

이 교수는 "현재로선 끝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잘 연구하고 훌륭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과, 여성과학기술인 지원을 위한 봉사가 큰 목표이자 소명"이라고 했고, "그 이후에는 공부하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사회에 봉사를 하겠다"고 한다.

김 교수 역시 연구자로서 성실히 본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처럼 오랜 시간에 거쳐 성과가 나오는 일일수록 묵묵히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는 성실함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문화와 환경이 중요하다"며 우리 사회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더 우대하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이어 그는 "과학계 발전을 위해선 사람과 환경, 역사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 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위 기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공동 기획, 제작되었습니다. 각 부부의 자세한 이야기는 과학기술한림원 웹진(http://kast.tistory.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