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12일 새해 특강에 200명 참석
"관찰 통해 질적 성장 도모···지식 생산국으로 거듭나야"
지식의 높낮이를 떠나 10대부터 대학총장까지 한자리

 

최진석 교수가 시대의 아픔 함께하는 '知識人'의 태도로 '관찰·고유·선도' 등을 언급했다.<사진=대덕넷>
최진석 교수가 시대의 아픔 함께하는 '知識人'의 태도로 '관찰·고유·선도' 등을 언급했다.<사진=대덕넷>
"고유함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문명의 선도력을 가질 수 없다. 호기심이 발동될 때 보고 관찰할 수 있다. 관찰할 수 있어야 지식 생산이 가능하고, 지식 생산이 가능해야 우리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있다."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덕연구단지를 찾아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개인의 고유함을 기반으로 시대를 들여다보고 시대가 지닌 한계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가 12일 대덕단지를 찾아 '지식의 생산과 인격의 성숙' 주제로 강단에 올랐다.<사진=대덕넷>
최진석 교수가 12일 대덕단지를 찾아 '지식의 생산과 인격의 성숙' 주제로 강단에 올랐다.<사진=대덕넷>
대덕넷과 대덕연구단지 내 자발적 커뮤니티인 'DASI'·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한국과총 대전지역연합회는 12일 KAIST 학술문화관에서 '롤러코스터 시대 삶의 중심 찾기'를 주제로 최진석 교수의 새해 특강을 개최했다.

최진석 교수가 시대를 돌파하는 선도력을 지니기 위해 강조한 것은 '관찰'이다. 최 교수는 인간이 과학적으로 진화하는 출발점이 관찰이라며 한국의 비빔밥과 일본의 스시를 비교했다. 스시를 먹어 온 일본인은 음식을 관찰하면서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한 반면 한국인은 관찰하지 않으면서 음식의 질적 고양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비빔밥이 스시보다 영향력이 약한 이유는 관찰의 차이"라며 "어떤 한 사람은 자신의 음식을 관찰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먹기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음식을 관찰하며 더 나은 상태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관찰은 진화나 지적 성장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돼 무엇인가 관찰하는 사람은 '최초의 질문을 던진다"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위대한 것, 앞선 것, 높은 것은 전부 질문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할 때 자신의 고유성을 세상에 발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관찰에 이어 지식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그는 "지식은 인간의 도전 정신이 추상적인 형태로 체계화된 것이고 세계를 설명하는 장치"라며 "지식의 태생은 인간이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인데 세계를 설명하려는 지식 욕구는 사라지고, 세계를 판단하려는 기능적인 활동에 빠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식 수입국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지식을 수입했다는 것은 삶을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수입했다는 것이다. 삶의 방식을 수입하는 것은 곧 삶의 종속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 지식 생산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요소로 최 교수는 지식인의 '관찰, 고유함, 호기심'을 꼽았다. 그는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함으로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될 때만 자기 자신"이라며 "호기심이 있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만 지식 생산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시대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지식인을 '시대가 아파하는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공적 범위, 시대 문제를 내 문제로 생각해 덤비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최 교수는 개인의 고유함을 기반으로 시대의 사명으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강연을 마쳤다. 

이날 특강에 참석한 200여 명은 특강 이후에도 참여자 간 그룹 토의·심화 토론을 이어갔다. 오후 2시부터 4시간 동안 이어진 이번 행사는 지식의 높낮이를 떠나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다. 이들은 사유의 시선을 공유하고 서로의 소감을 주고받았다.  

이날 진행된 최진석 교수의 강연 내용을 아래에 담았다.
  

◆진화·지적 성장을 위한 출발점···'관찰'

관찰에 관한 사례를 말씀드릴게요. 우리나라 대표 음식, 비빔밥을 비비는데 잘 안 비벼졌던 경험이 있으셨죠? 잘 비벼지는 비빔밥은 젓가락으로도 충분히 비빌 수 있어요. 비빔밥이 잘 안 비벼지는 이유는 적당한 밥의 양, 점도, 나물을 올릴 때의 방식이 표준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최 교수가 비빔밥과 스시를 설명하며 관찰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최 교수가 비빔밥과 스시를 설명하며 관찰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사진=대덕넷>
비빔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일식집에 간 적이 있어요. 초밥이 만들어지기까지 밥 종류, 밥의 점도, 밥알의 갯수, 식초의 양, 온도, 초밥을 놓기 좋은 그릇까지 모두 표준화가 돼 있었어요.

표준화가 돼 있다고 모든 맛이 똑같은 게 아니에요. 표준화를 기반으로 더 나은 상태의 초밥을 추구할 수 있죠.

비빔밥이 초밥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비빔밥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찰. 어떤 한 사람은 음식을 주의 깊게 관찰해서 더 나은 상태를 추구했고, 어떤 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음식을 관찰하지 않고 단순히 먹기만 했어요. 자신이 먹는 음식을 관찰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먹어 온 사람들은 다음 단계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스시를 가진 일본 사람과 비빔밥을 가진 한국 사람은 매우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태도가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를 만듭니다. 핵심은 관찰입니다. 관찰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판매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했고, 질적 고양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비빔밥을 관찰한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비빔밥이 기능적 진화는 했어도, 질적 진화는 못 한 것이에요.

비빔밥과 스시의 차이는 관찰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 하나예요. 관찰은 인간이 진화하는데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인격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관찰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관찰하게 되면 매우 다행이지만, 마음먹어도 안 되는 것이 관찰입니다.

마음먹어서 되는 일은 '기능'이고, 마음먹어서 안 되는 일은 '인격'이에요. 무엇인가를 알고 행해지는 것은 기능이에요. 무엇인가를 알고도 행해지기 어려운 것은 인격입니다. 결국 사람의 문제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해내야 돼요. 인간이 지적으로 성숙해나가는데 핵심은 '관찰'입니다. 

시선을 머물게 하고, 머물게 하고, 머물게 하면, 내가 원래 봤던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죠. 그때는 내가 가진 판단 장치들이 무너지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I see you'라고 해요. 나는 당신을 판단하지 않고 본다는 것이에요. 대개 부부싸움은 판단 장치들의 충돌이에요. 배우자를 보지(관찰하지) 않죠. 판단할 뿐이죠. 판단하는 사람은 멈춰 있는 사람입니다. 판단 장치란,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마음, 즉 편견 혹은 신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지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점은 '관찰'.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합니다. 

◆"미래는 옳고 그름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최 교수가 지적 활동인 '질문'과 지적 소비인 '답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대덕넷>
최 교수가 지적 활동인 '질문'과 지적 소비인 '답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대덕넷>
관찰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할 때 발휘됩니다. 인간의 지적 활동성을 '질문'이라고 하고, 궁금증과 호기심이 없는 것을 '대답'이라고 합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돼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사람은 '최초의 질문'을 던집니다. 반면 궁금증과 호기심 없이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있는 지식을 다루기만 하죠. 즉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활용해 대답만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곳곳에서 '새로운 물건이 안 만들어진다', '자유롭지 못하다,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에게 질문이 없고 대답만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로 채워진 사회는 모두 과거 논쟁에 빠져 있어요. 과거를 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 풍토는 미래를 말하는 것보다 과거를 철저하게 밝히는 것을 중시하고, 그렇게 해야 내가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이 느끼도록 훈련돼 있어요.

우리나라는 질문보다 대답에 빠져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살지 못하고, 과거를 살고 있어요. 과거라는 것은 '원래 모습'이 기준이 됩니다. 원래 모습을 기준으로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말하죠.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는 제일 먼저 따지는 것은 '그 사람이 과거에는 어땠는가',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 이것을 중요하게 다루죠.

중국말에는 '영웅에게는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앞선 것들, 위대한 것들, 높은 것들은 옳기 때문에 등장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등장해요. 옳고 그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새로운 등장을 만들 수 없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위대한 것, 앞선 것, 높은 것은 전부 질문의 결과다.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왜? 대답할 때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지식 수입'은 삶의 종속···"문명 선도하려면 '지식 생산'해야"

지식의 태생은 세계를 설명하려는 인간의 도전 정신이 추상적인 형태로 체계화한 것이에요. 그 태생은 인간이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에요.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세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도전보다는, 만들어진 설명 능력을 그대로 내면화해요. 

세계를 설명하려는 지식 욕구는 사라지고, 세계를 판단하려는 기능적인 활동에 빠져요. 왜? 편하기 때문이에요. 세계를 만들어진 설명 장치로만 적용하는 것은 편하죠. 세계를 설명하려고 덤비는 것은 힘들어요.

이를 '지적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세계를 설명하려고 덤비는 것은 '지적 부지런함'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인간은 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할까요? 세계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 이해의 목적은 이 세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에요. 지식이라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매우 고효율적인 추상장치입니다. 세계의 주도권은 지식과 이론을 만든 사람이 가져갑니다.

추상. 추상은 인간의 높이입니다. 인간은 추상하는 능력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장치입니다. 세계를 설명하려고 덤비는 것은 어려워요. 이것은 인격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세계를 설명하려고 덤비기 위해선 자신만의 관심, 즉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궁금증과 호기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문명은 지식의 결과예요. 지식의 결과가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지식을 수입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에요. 삶을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모두 수입했다는 것과 같아요. 지식을 수입했다는 말은 내 삶이 '종속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식 수입국이다'라는 것은 우리 삶이 종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속적인 몇 가지 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해서 쓰고 있는 물건은 '한글' 이외에는 없어요. 우리 삶을 규제하는 제도. 우리가 만들어서 사용하는 제도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철학 결과를 내면화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플라톤, 스피노자의 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것, 이것은 철학이 아니에요. 낭송가입니다. 내 문제를 보편적인 높이로 승화하는 게 철학입니다. 내 문제를 보편적인 높이로 승화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철학이 아닌 것이죠.

◆지식인은 '시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승화하는 사람

문명을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문화'라고 합니다. 문화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에요.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만들어진 변화를 수용해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 '독립적이다', '주체적이다'라고 말하고, 변화를 따르는 사람을 '종속적이다'라고 말해요.

우리는 문명의 종속적인 단계예요.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고, 여행을 다닌다고 해도 아직 자유로운 단계는 아닙니다. 자유롭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하지 못해요.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해요.

내 운명이 나한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즉 '감각'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 종속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는 지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감각적으로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 불안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이 단계는 감각, 비지식적, 비과학적인 수준입니다. 지구가 도는 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구가 평평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지구가 돈다는 것을 '감각'이 아니라 '사유'로 알아야 해요. 감각되지 않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 것, 이것이 과학적 태도입니다. 이 욕구를 갖는 일은 지식이나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입니다. 결국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따라하기, 감각적으로 살기, 관찰하지 않기, 편하게 살기. 이렇게 되면 자기 운명을 자기가 좌지우지 못해요. 내 운명이 다른 사람 손아귀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시진핑 중국 주석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반도는 원래 중국 땅이었다"라고 말하고, 트럼프가 시진핑의 설명을 듣고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말을 해도, 그것이 내 운명하고 어떻게 관계 되는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시진핑과 트럼프의 대화처럼 거리가 있는 일을 개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지적인 능력이고, 관찰력입니다.

지적이지 않은 사람은 '만져지고, 감각되고, 접촉되는 일'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식인이라면 나한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가 아파하는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시대가 걸린 병을 치료하려고 덤비는 사람이죠. 시대가 아파하는 것은 나와 거리가 있어요. 이런 거리를 '추상적', '공적'이라고 합니다. 지적이다는 의미는 공적 범위, 시대 문제까지 내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시대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내면을 가진 사람의 생존의 질과 양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존의 질과 양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시대를 구할 수 있고,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있습니다.

◆"고유함에 대한 집착 없이 문명 선도할 수 없다"

평범하게 살다가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성'을 갈망해야 합니다. 의외성이 출발하는 것은 '고유함'입니다. 훈련된 지성은 예술품 앞에 서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맥박이 빨라져요. 이 감동은 예술품이 압도적인 위압감에 굴복하는 것인데, 그 압도성의 출발점을 의외성입니다.

고유함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문명의 선도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고유함이 등장할 때 인간의 질적 활동을 질문이라고 해요.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에요. 이것이 질문입니다. 이 궁금증은 이 세계 어느 누구하고도 공유되지 않아요. 인간은 나한테만 있는 질문이 발동될 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질문할 때만 비로소 '자기 자신'이에요.

즉 궁금증, 호기심이 있을 때만 '자기 자신'이에요. 호기심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어요. 볼 수 있어야만 관찰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어야만 지식 생산이 가능해요. 지식 생산을 할 수 있어야만 우리 손으로 우리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요. 아무리 과학적인 높은 성취를 내고 싶어도 보는 능력이 없으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에요.

지식의 생산이란 결국 자유로운 사람이 하는 일이에요. 우리가 지식을 생산하면 우리 사회도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항상 우리 운명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12일 특강 행사 전체의 모습과 분위기. 행사에는 10대 청소년부터 대학총장까지 다양한 각계각층 참가자들이 찾았다<사진=대덕넷>
12일 특강 행사 전체의 모습과 분위기. 행사에는 10대 청소년부터 대학총장까지 다양한 각계각층 참가자들이 찾았다<사진=대덕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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