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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순 소장 "핑계 100개보다 긍정답변 하나면 된다"

[원로에게 듣는다④] 故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
"과학 기술도 외국에 종속되면 기술 식민국"
중수로 핵연료 양산화·경수로 핵연료·원전 설계 기술자립 성공
故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외국에 종속되면 기술 식민국과 다름없다며 기술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의 진심어린 열정에 연구자들도 마음의 문을 열며 우리나라는 핵연료 기술자립, 한국형 원전 설계에 성공, 원전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다.<사진=대덕넷DB>故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외국에 종속되면 기술 식민국과 다름없다며 기술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의 진심어린 열정에 연구자들도 마음의 문을 열며 우리나라는 핵연료 기술자립, 한국형 원전 설계에 성공, 원전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다.<사진=대덕넷DB>
지난 10일 현 정부의 출범 2주년을 맞았다. 한국의 현실은 산업, 경제, 일자리, 성장 동력 등 여러 지표에서 빨간불이 켜지며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무엇보다 과학선진국들이 인공지능, 자율차, 우주탐사 등 미래 과학기술 선점을 위해 질주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과학기술 기반의 미래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방향성을 잃고 있는 상태다. 본지는 과학계 원로와의 인터뷰(또는 가상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 연구자와 정부의 역할을 들어 보았다.<편집자 편지>

"연구소에 부임해 오니 5시만 되면 다 퇴근하고 밤에는 그야말로 깜깜했어요. 중수로핵연료 양산 사업 구상안을 작성해 오라고 하니 안되는 이유만 가득 적어 왔고요. 이러니 희망없는 연구소 소리나 듣게된다고 야단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새로 적어 오라고 했죠."

원자력발전 기술을 통해 대한민국의 에너지 자립을 이끈 '원자력 대부' 한필순 前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 ADD(국방과학연구소)에서 미사일개발단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1982년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분소장으로 발령받는다.

당시 우리나라는 5공화국 탄생 시기로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했다. 미국은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원자력연 폐쇄를 요구해 왔다. 약소국의 비애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듯이 우리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원자력연과 핵연료개발공단을 통합해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빼고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기관명을 변경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소장이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분소장으로 임명돼 내려왔다.

정치적으로 폐쇄 직전에 이른 연구소의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연구비는 대폭 삭감됐고 연구환경은 컴퓨터도 없을 정도로 이름만 연구소일 뿐이었다. 일부에서는 연구실적도 없는 연구소라며 문을 닫는게 답이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연구자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연구소의 미래도 암울한 그림자가 짙었다.

한필순 소장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이면서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원자력 전공자는 아닌 셈이다. 원자력계가 아닌 그를 두고 몇몇은 '얼마나 버티겠어'라며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한 소장은 "에너지 자립을 하지 못하면 기술 식민국이 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연구자들의 신임을 얻는다. 나아가 원자력 연료를 국산화하고 한국형 원전 설계 자립 기반을 마련한다. 짧은 시간안에 기술 자립이 가능했던 것은 그와 연구진이 사심없이 국가의 원전기술 자립에 심혈을 기울이며 열정을 쏟았기 때문이다. 2015년 1월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후배들로부터 '원자력 대부'로 여전히 존경받는 이유다.

'원로에게 듣는다' 4편은 故 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의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 후배와 유족이 펴낸 '맨손의 과학자 한필순' 저서를 통해 그의 원자력 기술 개발 의지와 과학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평소 철학을 다시 들어본다.

◆ "안되는 이유 100가지 말고 긍정적 답변 1~2개면 충분하다"

한필순 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UAE 원전 수출에 감개무량함을 표했다.<사진=대덕넷 DB>한필순 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UAE 원전 수출에 감개무량함을 표했다.<사진=대덕넷 DB>
"연구소에 오니 연구자들은 연구 의욕이 없었고 다른 기관으로 떠날 생각만 하고 있더군요. 밤 늦게까지 남아있는 연구자가 거의 없었어요. 매일 밤 연구소를 돌며 연구자들을 격려했어요.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불러 일으키기에 집중했죠."

한 소장이 연구자들의 연구의욕 고취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환경 개선. 필요한 설비를 구입하고 도서관의 신간을 적극 구입했다. 연구자들의 건강을 위해 체육 시설도 마련했다. 연구비가 대폭 삭감된 상태라서 한 소장은 이전 근무했던(한 소장은 친정이라고 표현) ADD에 가서 구걸하다시피 연구비를 확보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연구자들의 연구환경 개선을 위해 겨울철에 시설 보강 공사가 이뤄졌다. 이를 보고 있던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왔다. 겨울철에 무슨 공사인지 의심스럽다면서 말이다.

한 소장은 "행정쪽 감사, 소장 감사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지만 연구실 감사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노라"고 으름장을 놨다. 감사원들이 그의 확고한 태도에 슬그머니 감사를 멈췄다.

진심은 통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연구자들이 하나, 둘 마음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던 연구자들도 귀를 기울이며 늦도록 연구에 몰입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80년대 초에는 지금과 달리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모습이 일상이었다.

한 소장은 기관의 연구 과제 목록을 살펴보았다. 각자 진행되면서 제대로 이뤄지는 연구과제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방향성을 잃게 된다는 판단 하에 그는 "우리가 가장 잘 할수 있는 과제 한가지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결정된 과제가 '중수로 핵연료 양산 사업'이다.

"과제 담당자에게 양산 사업 구상안을 작성해 오라고 했더니 모두가 안되는 이유만 잔뜩 늘어놨더라고요. 화가 났죠. 그래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100가지라도 필요없고 긍정적인 아이디어 한두개면 된다며 새로 작성해 오라고 했어요."

한 소장의 열정과 진심에 연구자들도 힘을 모으며 국내 기술로 중수로 핵연료 개발에 성공한다. 어려움은 산너머 산이었다. 국내에서 개발한 핵연료를 어떻게 믿고 쓰겠느냐(당시 표현은 엽전이 개발한 기술을 어떻게 믿느냐)는 한전 측의 거절로 국내에서 실험조차 할 수 없었다.

◆ "과학기술도 종속되면 나라 잃은 식민지와 같다"

"중수로 핵연료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캐나다와 연락을 취했어요. 그런데 너무 큰 금액(300만 달러)을 요구해 40만 달러로 겨우 확정하고 진행하기로 했어요. 정부에서는 이 돈도 많다며 무료로 해야한다고 하더군요. 낙담을 하고 귀국하려는데 캐나다에서 해준다는 연락이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었어요."

캐나다에서 실시된 핵연료 시제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원자력 기술 불모지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기술개발에 성공한 것. 원전 기술 자립을 위한 연구가 본격화 된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지지와 한전의 지원도 이어졌다. 중수로 핵연료에 이어 경수로 핵연료 개발, 한국형 원자로 개발 연구가 추진된다. 당시 국내에는 중수로 1기, 경수로 8기로 경수로 핵연료 개발이 시급했다.

한 소장은 경수로 핵연료 자립 조건으로 3가지를 내세웠다. 경수로 핵연료 설계는 반드시 우리 과학기술자가 책임지고 수행하고, 기술 도입 결정도 과학기술자가 하고, 비용도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내용이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나라 연구자는 그만한 실력이 안되고 우리 자체로 하면 비리가 생기니 외국기술을 도입하던지 외국자본을 도입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당시 핵연료 과학기술자가 3~4명 뿐이었으니 무모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고 한 소장도 나름 인정했다.

한 소장은 3일간의 장고 끝에 공동설계 안을 제안한다. 그는 "경수로 핵연료 개발 기간이 1987년까지로 정해졌던 상태다. 4년 반만에 연구자 150명에게 설계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시간도 예산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나온 안이 공동설계(조인트 디자인) 기술자립안이다. 기술을 배우면서 개발하는 취지였다. 외국사에 무척 불리했지만 미국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이후 원전 전반의 침체기로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원전 기술로 내로라하는 해외 기업들이 사업 참여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경수로 핵연료 개발은 예산 문제도 문제였지만 인력 부족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면서 "미국 등 해외의 더 좋은 연구환경을 마다하고 한국행을 결정해준 김시환 박사, 박종균 박사의 도움이 컸다"고 감사함을 표했다.

공동설계사로 결정된 카베유사가 있는 독일 에어랑겐으로 30여명의 연구진이 떠났다. 미국 유명대학에서 박사급으로 무장한 소수정예 인원이었다. 지금은 과학자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게 무리지만 그때의 한 소장은 한국 연구자들의 애국심, 열정을 믿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독일의 연구자들이 배우고 싶다고 할정도로 한국 연구자들의 뜨거운 열정이 빛을 발하며 단시간에 기술을 익혔다. 한국은 경수로 핵연료 기술도 확보하며 기술 자립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 '必 설계기술 자립' 만세 삼창, '실패하면 죽을 각오'로 떠나다

원전 설계 기술자립을 위해 컨버스천엔지니어링사가 있는 미국 윈저로 떠나기전 한 소장과 연구진은 必기술자립 액자를 들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연구진은 기술 개발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연구개발에 매진, 3년만에 성공한다.<사진=대덕넷 DB>원전 설계 기술자립을 위해 컨버스천엔지니어링사가 있는 미국 윈저로 떠나기전 한 소장과 연구진은 必기술자립 액자를 들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연구진은 기술 개발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연구개발에 매진, 3년만에 성공한다.<사진=대덕넷 DB>

한필순 소장은 한국형 경수로 개발에도 시동을 건다. 인력, 예산 모두가 부족한 상태였지만 그의 '원전 기술 자립의지'를 꺾지 못했다. 한전 박정기 사장의 공감도 큰 힘이 됐다. 이번에도 '공동설계' 방식으로 진행, 미국의 컨버스천엔지니어링(CE)사로 결정됐다.

1986년 12월 4일. 김병구 박사와 이병령 박사를 사업책임자, 인솔책임자로 44명의 연구진이 CE가 있는 미국 코넷티컷 주 윈저로 떠나는 날이다. 김병구 박사는 미국 시민권자였지만 고국의 원전 기술 자립을 위해 시민권으로 포기하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한국형 경수로 탄생이 우리의 손에 달렸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원전 기술 자립을 못하면 우리는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기술 식민지가 됩니다. 실패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원전 연구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 앞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의 날이다. 한 소장의 이야기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한 소장과 연구진은 결연한 의지로 '必 설계기술 자립'이라고 쓴 액자를 들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러나 CE사는 처음 약속과 달리 한국 연구진에 허드렛일만 맡겼다. 이병령 박사가 그만 둘 각오로 CE사에 항의했고 한국의 연구진은 HOW 넘어 WHY까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한국의 연구진은 이같은 노력으로 3년만에 한국형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완성하게 된다. 한국형 경수로의 탄생이다. 1995년 영광3,4호기가 우리 기술로 정상 가동을 시작한다.

한 소장은 훗날 "한국이 원전 기술 자립에 성공하기까지 연구진의 열정과 노력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이정오 과기처 장관, 이봉서 동자부 장관, 김성진 과기처 장관의 무조건 지원이 있었다. 대통령들의 암묵적 지원도 힘이 컸다"고 회고하며 정부의 과학기술 관심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기술 자립을 이루면서 원전기술 강국에 올라섰고 지금은 수출도 하고 있다. 과학기술 성과는 연구자를 신뢰하고 인정하는 정책속에서 나올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당장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정책을 입안하거나 부처 이기주의에 연구자를 이용하고 희생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 한필순 소장은

1957년 공군사관학교(제5기)에 이어 1960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한국전쟁시 가족과 헤어지며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군에 입대, 쉬는 시간마다 수학책을 놓지않는 그를 눈여겨 보던 군의관 김효규 대위(훗날 연세의료원장, 아주대 총장)가 자신의 연구실에게 공부할 것을 권한다.  그는 국가 장학금을 받으며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이학박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던 한 소장은 2015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국가에 이바지 해야 한다'며 애국심이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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