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연구실⑨]화학연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불소윤활유·발수발유제 등 10여개 불소화합물 공정 국산화
"미래 20년간 선진국에 추격 안 당할 기술로 승부"


                                           대한민국 대표 연구실 한국화학연구원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영상=대덕넷 뉴미디어팀>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에칭가스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의 수출을 규제하면서 자주 언급되는 원소가 있다. 원소번호 9번 불소(F, 플루오린)다. 

에칭가스는 불소에 수소가 결합한 고순도 불소화합물로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할 때 사용된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불소가 처리된 플라스틱으로 플렉시블 스마트폰과 OLED TV 패널의 핵심 소재다. 최근 주목받는 이차전지와 태양전지 속에도 불소가 들어간다.

불소는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불소치약, 휴대폰 액정 지문방지제, 카메라 렌즈, 방수 등산복 등 생활 용품에도 쓰인다. 불소화합물이 가진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일부 영역에서는 대체 불가한 존재이기도 하다. 피부로 느끼지 못해도 불소는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 존재한다.

불소화합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지난 30년간 불소 소재를 연구해 온 이들이 있다. 1990년 설립된 한국화학연구원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다.

구성원 5명으로 출발한 연구실은 당시 100% 수입에 의존하던 불소화합물을 하나씩 국산화하기 시작, 현재 10여개 불소화합물 제조 기술 공정을 개발해냈다. 이 기술을 이전받은 국내 기업은 불소화합물 연구자와 기술력이 전무했던 불소 불모지에서 불소화합물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센터 창립 연구원이자 화학연 최고참인 이수복 박사는 "처음에 주변에서 우리의 도전을 무모하게 보기도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 기술력을 조금씩 인정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박사를 비롯해 연구실 1세대 박인준 박사, 센터장을 맡은 2세대 손은호 박사, 차세대 이명숙 연구원과 강홍석 박사를 만났다.

불소화합물 파일럿 플랜트에서. (왼쪽부터)이명숙 연구원, 손은호 박사(센터장), 강홍석 박사, 이수복 박사, 박인준 박사. 센터 구성원들 대부분이 말수가 적은 편이다. <사진=한효정 기자>
불소화합물 파일럿 플랜트에서. (왼쪽부터)이명숙 연구원, 손은호 박사(센터장), 강홍석 박사, 이수복 박사, 박인준 박사. 센터 구성원들 대부분이 말수가 적은 편이다. <사진=한효정 기자>
◆ 불소화합물 '뼈대 물질' 국산화 성공···불소윤활유 등 줄줄이 이어져

"연구실을 만들 당시, 뒤퐁·3M·아사히글라스·다이킨·솔베이 이 다섯 개 회사가 불소 시장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각국에 수출 할당량을 정했고 수출을 아예 안 하기도 했죠.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 때문에 국내 기업들은 완제품이나 원료에 물을 타서 팔았어요."

이수복 박사는 실험실 설립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실을 꾸린 지 2년 뒤, 연구팀은 과불소알킬 아크릴레이트를 원료로 '발수발유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수발유제는 물과 기름을 튕겨내는 성질이 있어 스포츠 의류·텐트·우산·섬유 등의 코팅 재료로 쓰인다. 

그러나 과불소알킬 아크릴레이트와 원료인 과불소알킬 알코올 역시 수입품이었다. 연구팀은 공정 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 재료부터 국산화했다. 그리고 불소화합물의 기본 뼈대가 되는 단량체 'TFE'와 'HFP'를 폐 PTFE에서 만드는 기술까지 확보했다. 

단량체는 불소화합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 제조 과정이 험난하다. 박인준 박사는 "단량체는 폭발성이 있어 다른 곳으로 이동이 안 되기 때문에 자체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폭탄처럼 다뤄야 할만큼 기술이 까다롭고 철저히 도제식 연구라서 많은 기업인과 연구자들의 연구가 대부분 여기서 막힌다"고 설명했다. 

이후 단량체 기술을 기반으로 불소윤활유, 투명 불소고분자, 액정 지문방지제, 연료전지용 과불소이오노머 등 여러 불소화합물 제조 공정 기술이 탄생했다.

단량체 기술만큼 어렵게 개발한 기술은 난이도 최상으로 알려진 '불소윤활유' 제조 공정. 불소윤활유는 기계를 잘 움직이게 해주는 기름으로, 안정적인 특성 때문에 한번 기계에 넣으면 교체가 필요 없고, 산성과 극한 온도에서도 윤활 작용을 한다. 이 물질은 군사용 무기·잠수함·우주선·초정밀 기계 등 특수 용도로 사용된다. 

연구팀은 5년간 실패와 발전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불소윤활유 공정 기술을 획득했다. 박 박사는 "그때 1년 동안 데이터를 한 번도 얻지 못해 좌절도 했다"며 "결국 성공해 시중 가격의 1/3~1/5 수준으로 제품 가격을 떨어트렸고, 품질이 해외 것보다 낫다는 평가도 듣는다"고 자신했다. 

◆ "기업인들 우리 연구실로 출근"···기술 배워가는 문화 1990년부터

연구실 근처에 있는 파일럿 플랜트. 내부에는 반응·증류 장치들이 가득하다. 파일럿 건물 안을 관통하는 증류탑에서 단량체를 얻어낸 후 응축해 저장했다가 반응시키면 불소계 고분자 소재가 탄생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연구실 근처에 있는 파일럿 플랜트. 내부에는 반응·증류 장치들이 가득하다. 파일럿 건물 안을 관통하는 증류탑에서 단량체를 얻어낸 후 응축해 저장했다가 반응시키면 불소계 고분자 소재가 탄생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연구팀의 역할은 실험실에서 불소화합물을 합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규모가 작은 공장인 '파일럿 플랜트'를 지어 불소 소재 제조 공정을 최적화하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상용 공장도 설계한다. 연구팀이 기업에 넘겨주는 기술은 불소화합물 제조법부터 공장 설계도까지, 즉 공장 건축 전 모든 단계다.

이 박사는 "화학공학을 전공한 연구원들은 본래 중간 파일럿 공정을 전문으로 하는데, 연구실 초창기에 직접 실험실 연구까지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며 "화학공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라고 소개했다. 

센터의 역할이 상용화까지 깊숙이 연결되다 보니, 연구자와 기업인이 한 조직처럼 함께 일하는 게 일상이 됐다. 기업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화학연으로 출근해 제품을 만들고 기술을 배워가는 문화는 1990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강 박사는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화합물 합성 성공에만 의미를 뒀는데 기업과 함께 일하며 현장에서 쓸모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배운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협력 기업과 분야를 다각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손 박사는 "협업을 기다리기보다 발굴해서 먼저 공동연구를 제안하고 있다"며 "지난 3월 켐트로스에 이차전지 핵심 물질인 PVDF 공정 기술을 이전했고, SK 머티리얼즈와도 연구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 불소 활용 무궁무진···지구온난화 가스 대체 신물질 도전

불소제품 국산화에 주력해 온 연구팀은 앞으로 차별화된 '기능성 정밀 불소화학재료' 개발로 승부를 보겠다고 밝혔다.

손 박사는 "세계 5대 불소 회사가 지배해 온 전통 범용성 불소화학 제품으로 경쟁하기 어렵다"며 "성능이 뛰어나고 고도 기술이 필요하면서 소량 생산으로도 이윤을 내는 고부가 가치 재료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개발 중인 차세대 불소화학재료는 온실가스 NF₃와 SF₆를 대체할 신물질이다. NF₃는 반도체 체임버 세정용 에칭가스로, SF₆는 변압기 내 절연가스로 쓰이는데 모두 지구온난화 유발 지수가 이산화탄소의 약 2만배에 달한다. 최근 환경 규제로 기업이 서둘러 생산량을 줄여야 할 상황에 처하면서 연구팀과 공동 연구에 돌입했다.

연료전지의 고가 불소고분자 '나피온'과 1kg에 수천만 원인 특수 구조 단량체 'TFE'도 개발한다. 박 박사는 "이것들은 모방 기술이 아니라 선두 주자로 가는 기술로써 한 번 개발해 놓으면 적어도 20년 정도는 추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숙 연구원은 "불소는 기존 소재와 확실히 다른 특성이 있어 활용 범위를 예상할 수 없다"며 "선배들이 확립한 단량체와 불소화합물 만드는 기술을 바탕으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왼쪽부터)이수복·박인준·손은호 박사. 화학연에 40년째 몸담은 이수복 박사는 40세 무렵 연구실을 만들어 지금까지 불소 연구에 매진했다. 내년 봄 퇴직을 앞두고 있다. 박인준 박사는 가업을 이으라는 부모님의 뜻을 뒤로하고 계면화학공학 석사를 졸업한 후 1988년 화학연에 왔다. 이후 불소발수제 연구 과제에 참여하면서 불소 연구에 발을 들였다. 손은호 박사는 올해 초 센터장에 선임됐다. 불소는 기존 소재와 다른 뚜렷한 특성이 있어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자신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왼쪽부터)이수복·박인준·손은호 박사. 화학연에 40년째 몸담은 이수복 박사는 40세 무렵 연구실을 만들어 지금까지 불소 연구에 매진했다. 내년 봄 퇴직을 앞두고 있다. 박인준 박사는 가업을 이으라는 부모님의 뜻을 뒤로하고 계면화학공학 석사를 졸업한 후 1988년 화학연에 왔다. 이후 불소발수제 연구 과제에 참여하면서 불소 연구에 발을 들였다. 손은호 박사는 올해 초 센터장에 선임됐다. 불소는 기존 소재와 다른 뚜렷한 특성이 있어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자신한다. <사진=한효정 기자>

이명숙 연구원(왼쪽)은 2009년 석사 학위로 입원해 지문 방지제와 연료전지의 전해질 핵심 물질인 과불소이오노머를 연구 중이다. 강홍석 박사는 3년차 막내 연구원이다. <사진=한효정 기자>
이명숙 연구원(왼쪽)은 2009년 석사 학위로 입원해 지문 방지제와 연료전지의 전해질 핵심 물질인 과불소이오노머를 연구 중이다. 강홍석 박사는 3년차 막내 연구원이다. <사진=한효정 기자>
◆ 연구자에게 연구실과 연구란.

▲손은호 박사 = 불소소재와 제조 공정은 산업적·과학적으로 우리 삶과 산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만드는 불소 소재도, 연구 자체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좋은 연구로 보여주겠다.

▲박인준 박사 = 공장 준공식 날과 경상 기술료를 받을 때 기쁘다. 적지만 그 돈을 받는다는 것은 제품이 시장에서 정말로 팔리고 있으며, 기술이 성공했다는 의미다. 최근 5년 동안 기업인들과 사업 심사관들이 어느 정도 우리의 기술력을 알아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기술이 변두리를 벗어나 세계와 경쟁할 만한 수준까지 꽤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명숙 연구원 = 대학원 과정에서 불소를 다뤄보지 않아서 화학연에 와서 어렵게 공부하며 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이전하고 제품으로 나오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

▲강홍석 박사 = 우리 센터에는 독보적인 기술이 있어서 오히려 기업에서 돈을 주고 연구를 같이하자고 찾아온다. 기업과 사람이 원하는 연구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닫는다.

▲이수복 박사 = 불소화학재료를 개발하고 상용화해서 화학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연구실 인력은 줄었지만, 그동안 훌륭하고 성실한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후배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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