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병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보실장· '과학자의 글쓰기' 저자
씨줄과 날줄로 엮는 생명의 노래

대덕넷은 8월부터 수요일 격주로 '최병관의 아주 사적인 과학'이라는 주제의 과학 서평을 게재합니다. 서평은 과학기술 분야 도서를 중심으로 최병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보 실장이 맡습니다. 그는 '과학자의 글쓰기', '나는 오십에 작가가 되기로 했다'를 쓴 작가입니다.  과학을 사랑하고, 과학책 읽기를 좋아하며, 과학자들과 '과학 수다'를 즐깁니다. 최병관 작가의 과학 서평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편지>

최병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보실장은 과학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 초에는 '과학자의 글쓰기'라는 책을 집필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대덕넷 DB>
최병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보실장은 과학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 초에는 '과학자의 글쓰기'라는 책을 집필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대덕넷 DB>
'달팽이 박사' 권오길 교수의 책은 언젠가 한 권은 읽어야 했다. 권 교수는 지난 1994년부터 매년 한 권씩 대중과학서를 쓰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후 지금까지 약 50여 권의 책을 써왔다. 그런 측면에서 권 교수는 나의 롤 모델이다. 나는 '과학자의 글쓰기'를 출간한 후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앞으로 매년 한 권씩 책을 쓰겠다"고 말해 버렸다. 권 교수의 '1권/연(年)'을 따라 하겠다고 엉겁결에 공표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손에 쥔 책이 '생명의 이름'이다. 50여 권의 책 중에서 왜 이 책이냐 하면 비교적 최근(2018년)에 나온 신작이기 때문이다. 그의 전작 '생명 교향곡'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펼쳐지는 생물들의 생태 이야기를 그렸다면 '생명의 이름'은 생명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에 주목하고 있다.

'생명의 이름'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천명(知天命, 50세)의 나이에 이르거나, 아니면 적어도 불혹(不惑, 40세)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나오는 많은 사례는 적어도 40~50세는 되어야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뿔사! 가만 생각해 보니 권 교수는 1940년생이다.

이 책은 정지용의 시 '향수'를 따라 우리 산과 들, 바다에서 온갖 생물들을 만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1부 '넓은 벌 동쪽 끝'은 들녘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작물과 들짐승, 들꽃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늘에는 해바라기 꽃을 달고 땅에는 감자를 품고 있는 것이 엉뚱하다고 해서 '뚱딴지'라 불리는 돼지감자, 신선의 손바닥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제주도에서 자생하고 있는 선인장 얘기 등이 담겼다.

2부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에는 우리 강을 수놓으며 제각기 생명력을 뽐내는 개구리밥과 연가시, 반딧불이 등에 대한 정담으로 가득하다. 잠자리를 뜻하는 '청령'이나 '청낭자'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 준다. 이어 3부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는 하늘로 높게 뻗어 올라간 나무와 산짐승의 얘기를 다룬다. '어미를 죽이면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살모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뱀의 억울한 사연과 학교때 배웠던 '황조가'에 등장하는 꾀꼬리의 애가도 귀기울여 볼만 하다.

4부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에서는 너른 바다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바다 생물들의 얘기를 담고 있고, 5부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지붕'에서는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라 여기며 자연과 공생해 온 '까치밥'을 남겨 둔 선조들의 아름다움을 살펴 볼 수 있다.

'생명의 이름'은 쉽게 쓴 과학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을 과학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는 권 교수가 지금은 흔한 단어가 된 '과학 에세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하면서 처음부터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읽기를 바라며 쓴 책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의 '과'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쓰려고 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려운 과학책을 예상한 사람들로부터는 "과학책 맞아?"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생명의 이름-저자 권오길(사이언스 북스).
생명의 이름-저자 권오길(사이언스 북스).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나는 '생명의 이름'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40~50세는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책 곳곳에서 옛날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풍족한 먹거리로 '배고픔'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은 대략 난감할 지도 모른다.예를 들어 벼, 감자, 참새를 얘기할 때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요즘 사람들이 듣는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이해할 수 있을까.

벼가 익기 전에 풋바심한 꼬뜰꼬들한 찐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질근질근 씹었는데, 생각할수록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그때 그 쌀 맛이 입안에 한가득 돈다.(p 15)

절미(節米)하느라 그랬지. 곱삶이 보리밥 밥사발에서 애 주먹만 한 감자 한 톨을 젓가락으로 쿡 찍어 들어 내면 정말이지 땅 꺼짐처럼 뻥 뚫린다.(p 20)

여름이면 처마 끝 이엉 집안에 있는 참새 알을 꺼내 대파에 깨 넣어 구워 먹고, 겨울이면 그 자리에 암수가 함께 잠자리를 트니 맨손으로 잡아 통째 구이를 해 먹었다.(p 236)

어디 그 뿐이랴! 책에는 사자성어가 가득하다. 선인장을 설명하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얘기하고, 백목련에서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말(馬)에서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을 거론한다. 그령에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을 얘기하고 반딧불이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형설지공(螢雪之功), 소나무를 얘기하면서 청송백설(靑松白雪)을 들려준다.(이밖에도 자연을 설명하면서 많은 사자성어를 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만 나열하겠다.)

내가 근무하는 대덕연구단지에는 각 출연연구원마다 자연모사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많은데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을 모방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은 '생명의 이름'을 읽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젊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생물의 살이를 씨줄로, 인간의 삶을 날줄로 엮은 자신의 경험과 해학의 물감들을 곁들여 인생이라는 직조물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연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너무 많은 사자성어를 사용해서 젊은 세대들은 다소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옛날 굶기를 밥먹듯 하던 사람들의 삶의 고충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권 교수의 첫 책은 '꿈꾸는 달팽이'다. 나는 어느 출판인의 '어떤 한 저자의 책을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첫 번째 책을 읽어라'는 말이 떠올라 '꿈꾸는 달팽이' 개정판을 구입했다. 권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꿈꾸는 달팽이'가 볼펜 13자루를 먹고 탄생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컴퓨터없이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꿈꾸는 달팽이'는 과연 어떤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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