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 나노. 27] 나노 전하입자 18년 ETRI 연구 노하우 상용화전자책부터 스마트윈도 시장진출 가능

전극 위에 놓인 전자종이에 전기를 넣으면 기판 디자인대로 이미지가 뜬다. 전기를 빼도 한번 뜬 이미지는 반영구적으로 유지된다. 전자책은 물론 광고판, 유통, 패션까지 다채로운 쓰임이 기다린다. 그런데 이 좋은 전자종이가 그동안 독점재였다. <영상=윤병철 기자> 

독서를 즐기는 손에 30쪽 부피 공책만큼 얇고 가벼운 전자책이 들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햇살 아래 더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 수 만권의 책을 배터리 걱정 없이 한 권의 전자책에서 볼 수 있는 기술혁명은 전자종이 덕분이다. 

전자종이는 정전기로 움직이는 잉크를 품은 필름으로 전원이 꺼진 상태서도 이미지를 유지한다. 변화무쌍한 이미지가 뜨는 디지털 디스플레이지만 얇고 가벼운 종이와도 같다. 전원은 한 번 충전으로 일주일을 간다. 아마존 '킨들'이나 국내 출판사의 '크레마'든 전 세계 전자책 리더기에는 반드시 이 필름이 깔린다.

그런데 이 필름을 전 세계 유일하게 한 곳에서 독점 공급한다. 그 세월이 20년. 이 아성을 내년 2020년 깰 것이라고 포문을 연 스타트업이 있다. 신생 전자종이 제조기업 '엔스펙트라(대표 김철암)'다.  

◆ 독점사보다 제어 효율적인 국산 컬러 전자종이
 

 

가운데 넓은 회색 필름이 엔스펙트라의 전자종이. 그 주변으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응용 제품들이다 <사진=윤병철 기자>
가운데 넓은 회색 필름이 엔스펙트라의 전자종이. 그 주변으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응용 제품들이다 <사진=윤병철 기자>
"사는 자가 파는 자의 눈치를 보는 부품이 전자종이입니다. 독점사가 공급을 쥐고 있으니 응용제품 시장이 못 커요. 엔지니어가 두고 볼 판이 아니죠." 김철암 대표의 창업 동기다. 

70년대 전하를 띤 입자에 전기장을 주면 전원 공급이 없어도 입자의 위치를 유지한다는 '쌍안정성' 이론이 발표됐다. 그 후 1998년 미 MIT에서 이론을 실현한 필름으로 특허를 냈다. 그 소속 연구원들이 회사를 차린 게 'e잉크'로 전 세계에 전자종이 필름을 장악한다. 

독점 이유는 다른 데서 그만한 품질과 가격이 안 나와서다. 전기장에 따라 배열이 질서 있게 움직이고, 전원을 꺼도 멈춘 상태를 유지하는 전하 띤 나노입자 잉크를 '잘' 만드는 것이 기술이다. 20년간 1000여 곳의 기업이 전자종이에 도전했지만 다 실패하고 e잉크만 남았다.

전자종이 필름이 들어간 제품은 주변에 흔하다. 전자책, 마트 가격표시 명찰, 은행 비밀번호 카드, 각종 광고 디스플레이 등 종이와 육중한 전자 디스플레이를 대체할 소재로 응용과 경제성이 뛰어나다. 유연하고 동시제어가 가능하며 전력소모가 LCD의 5%다. 수요가 늘면 늘지 줄지 않는다.

그러나 필름 공급사가 이 판의 지배자라 전자기기 제조사들이 제품 물량을 늘리고 싶어도 제공 일정만 기다린다. 많이 주문해도 에누리가 없다. 시장의 성장이 독점으로 움츠린 셈이다.

마침 지난해 전자종이 특허가 20년이 지나 풀렸다. 특허는 풀렸지만 e잉크에 대항할만한 도전자가 없었는데, 신생 엔스펙트라가 '풀 컬러' 전자종이로 도전장을 낸다.    

엔스펙트라는 단 2개 입자로 총천연색을 구현한다. 비결은 비단벌레의 현란한 무늬 같은 광결정 소자로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해 색을 내는 구조다. 엔스펙트라는 균일한 입자들을 필름 사이에 놓고 전기장을 조절해 뭉친 입자들에 반사된 빛의 파장을 달리한다. 전기장 세기를 높이면 반사굴절 파장이 짧아져 파란 빛, 세기를 낮추면 파장이 긴 빨간 빛이 나오는 식이다.  

이에 비해 e잉크는 빨·청·노·녹 4개 입자 덩어리를 필름 사이에 놓고 간격을 조정하며 입자를 재배열해 색을 만든다. 이에 비하면 전하량 세기만 조절하는 엔스펙트라의 풀 칼라 구현이 제어가 단순하고 효율적이다.

김 대표는 "이 기술이 후발 주자가 독점 사를 이기는 보검"이라며 "ETRI 연구원 시절부터 쌓은 노하우가 만만치 않다"고 자신했다.     

공정별로 나노입자 응용제품 다양···스마트윈도 가능
 

 

전자종이 내 전하 잉크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진=윤병철 기자>
전자종이 내 전하 잉크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진=윤병철 기자>
"전자종이는 물론 이를 만드는 각 공정별로도 응용제품들이 나옵니다. 벌써부터 대기업 연구 소재나 자동차용 코팅 필름까지 공급하며 매출이 일어나고 있죠."

수원에 있는 공장에는 나노 잉크에 전하를 입히는 표면처리부터 입자 캡슐화, 필름에 캡슐을 도포하고 전기장을 걸어주는 단계까지 상용화 공정이 돌아가는 중이다. 여기서 내년부터 본격 시판될 전자종이의 원형이 만들어진다. 

김 대표가 개발한 나노 잉크는 빛의 투과도를 변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전기장에 따라 입자가 모이고 흩어져 투명한 창을 순간 불투명하게 만드는 스마트윈도 소재가 된다. 국내 대기업 연구소에서 엔스펙트라의 나노 잉크로 시제품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이 나노 입자는 차량용 페인트 코팅 필름(PPF)의 인장강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3M 등 외산 일색인 코팅 필름에 유연하고 질긴 국산 필름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엔스펙트라의 작은 성과다. 코팅 필름은 내년 초 출시된다. 

이 밖에 유연하고 초저전력의 전자종이를 이용한 다양한 응용 품도 만들어 연관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현재 완성한 시계용 모듈은 한국탄소나노산업협회의 증지원사업으로 개발했다. 해외에는 전자종이를 입힌 스마트폰과 케이스, 전자시계, 악보, 유리창 등 관련 시장이 활성화됐는데, 국내 시장에 수요를 미리 제안할 목적이다.

하지만 다양한 제품군 가운데서 김 대표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전자종이의 완성도. 독점시장을 깨려면 보다 월등하고 차별화된 제품을 선보여야 한다. 이를 위한 풀 칼라 전자종이의 완성이 눈앞에 있다. 그는 "다양한 수요처들이 우리에게 기대를 하고 있어 사업을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밝혔다.

수요처 기대로 시작한 창업 "유니콘 소재기업 되겠다"
 

 

18년 연구와 실용화 기술이전을 통해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노하우를 축적했다 <사진=윤병철 기자>
18년 연구와 실용화 기술이전을 통해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노하우를 축적했다 <사진=윤병철 기자>

대전 집에서 수원 공장까지 매일 왕복 3시간 출퇴근을 불사하며 '전자종이 국산화' 투지를 불태우는 김 대표는 고분자공학 전공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과학자였다. 그가 정부 과제로 전자종이의 핵심원리인 쌍안정성 연구를 시작한 게 2002년부터다. 전자종이를 구현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등장한 때다. 

그가 중견 연구원인 2013년, 전자종이 원리를 응용한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중소기업의 기술이전과 개발을 도왔다. 까만 바탕의 필름 위에 흰 입자만 움직여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로 양산 공정과 다양한 수요처의 시제품까지 진행했다. 그런데 파견 기업이 사업화 여력이 떨어져 생산을 포기했다. 

그가 연구소에 돌아왔을 때 주변 수요업체들에서 상용화를 기다린다는 아쉬움을 들었다. 전자종이 필름은 못 만들지만, 응용제품은 잘 만드는 국내 제조사가 많았다. 전자책도 아마존에 앞서 먼저 만들었던 한국이다.

"주변 수요기업들에서 필름이 시장에 나오길 다들 바라는 거예요. 엔지니어로서 연구한 성과를 시장에 선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김 대표는 전자종이 기대 수요에 부응하고자 2017년 창업에 돌입했다. 상용화를 위한 과제를 기획하고, 연구원 창업제도를 통해 법인을 세우고 기술이전을 진행했다. 그 과정서 겸직 위반이 발생하고 규정상 절반만 기술이전 되는 등 창업 과정에 애로가 있었지만, 독점사보다 우위의 기술력을 믿고 결국 독립했다.        

그는 "인재 때문에 수원에 공장을 세웠다"고 말했다. 전자종이 개발은 어느 정도 연구력이 있는 인재가 필요한데, 대전에 청년은 많아도 숙련된 현직 과기인은 합류하기 어려웠다. 현재 수원 공장에는 화학·전기·전자·고분자 분야의 다양한 경력 인재들이 엔스펙트라의 구성원이다.  

바라는 제품을 본격 출시하고 데스밸리를 지나는 동안 불편한 일상에 각오가 섰다는 김 대표는 다른 연구원에게도 창업하길 바랐다. 안정적인 환경도 좋지만, 긴 호흡으로 한 분야에 집중하기 어려운 정부출연연구소의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연구원은 알 수 없는 역동적인 사업가 생활이 좋다"며 "스타벅스 전자주문판에 우리 필름이 공급될 정도로 대중화 돼, 궁극적으로 유니콘 소재기업이 되고 싶다"고 희망했다.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기계 가동소리도 시끄러웠다. 김 대표는 "곧 출시가 임박해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진=윤병철 기자>.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기계 가동소리도 시끄러웠다. 김 대표는 "곧 출시가 임박해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진=윤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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