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C‧ESC, 임신부 연구자 실험환경 설문조사
복지 사각지대 놓인 이공계 대학원생‧박사후연구원
대체 인력 확보, 연구책임자 인식 개선, 고용보장 외침

#대학의 박사후연구원이었던 A 박사는 첫 임신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몇 달 뒤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연구책임자가 사직을 권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일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A 박사는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연구자도 아니었고 컴퓨터로 일하는 시뮬레이션 과학자였다.

#임신한 B 박사는 실험실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았지만, 앞날이 걱정됐다. 연구직으로 취업하거나 연구과제를 지원할 때 최근 3~5년간의 실적으로 평가받는데 공백이 생기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육아 휴직은 꿈도 못 꾸고 있다.

일과 출산 사이의 고민은 전문직인 이공계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실적을 쌓을 시기에 임신한 연구자에게는 경력단절과 성과 평가의 두려움이, 학생 연구자에게는 제대로 된 출산휴가를 받을 수 없는 고충이 있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ESC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가 지난 10월 22일부터 10일간 국내 이공계 임신부 연구자를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다. 설문에는 대학, 연구기관, 기업에 속한 연구자와 대학원생 등 413명이 참여했다. 설문 문항은 21개. 그중 임신부 연구자를 위해 제안하고 싶은 것을 적는 주관식 항목에는 임신부 연구자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 경력단절 방지 대책, 대체 인력 필요

공통으로 제기된 문제는 경력단절이다. C 연구자는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연구활동 저하와 업적 저하가 결국 경력단절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라며 "이를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B 연구자는 "학생이나 박사후연구원은 취업이, 이미 연구책임자가 된 분들은 연구 과제가 걱정되어 충분히 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D 연구자는 출산 50일 뒤에 복직했다. 교수의 강요도 눈치도 없었지만 자리를 오래 비워 업무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업무 문제가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대학이나 연구소의 영유아 보호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여성 연구자들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일을 쉰다"고 전했다.

이들은 임신과 출산 공백이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도 부담을 느낀다. E 연구자는 "연구원은 직무 특성상 출산휴가 중 대체 인력을 구하기 쉽지 않다"며 "연구직만의 인력 뱅크를 확보해 운영하면 육아기 연구자의 경력단절을 막고 출산 예정자도 휴가를 눈치 보지 않고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 출산휴가와 계약 보장, 비정규직에게 먼 이야기

경력단절을 걱정하기도 전에 출산 휴가 일수, 단축근로시간, 출산휴가 급여 등을 보장받지 못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기관이 아닌 대학교 실험실에 소속된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다. 설문에 따르면,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학생은 눈치를 봐야 하고 연구책임자의 기량에 따라 휴가일수 등도 달라진다.

F 연구자는 "학생연구자는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 합법적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G 연구자는 "학생 또는 박사후연구원은 법정 출산휴가 90일조차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최소한의 권리를 누리게 해달라"고 토로했다. H 연구자는 "임신부 대학원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며 "기업처럼 법정 제재가 가해져야만 상황이 개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계약직 연구자에게도 상황은 비슷하다. I 연구자는 "보통 임신과 출산 관련 정책은 정규직 연구자에게만 해당한다"며 "계약직 연구자는 육아휴직 중에 계약기간이 끝나면 휴직이 중단된다"고 밝혔다. 응답자들은 임신이나 출산휴가 중에는 계약을 해지하지 못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 "가장 힘든 건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다른 처우보다도 연구책임자의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수다. 이들은 일부 연구책임자들이 대학원생의 임신에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구 배제, 불이익, 사생활 침해, 학업 중단 등이 일어난다고 호소했다.

J 연구자는 "여전히 임신을 하면 동료와 교수님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게 현실이다. 간접적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교수님들이 적지 않다"고 호소했다. K 연구자는 "임신부 연구자의 경력단절을 막는 데 연구책임자와 연구실 구성원들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연구책임자의 인식개선 교육, 구체적인 관리 감독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임신 상태를 동료들이 인지한 후 연구실 차원에서 그에 걸맞은 조치와 배려가 있었냐'는 질문에도 응답자의 30%(123명)는 없었다고 답했다.

이 밖에도 임신부의 업무시간 단축, 유해물질 실험 배제, 휴식 공간, 실험형태 변경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특히 화학약품 등을 사용하는 이공계 연구자들은 유해물질 사용에 불안해했다. L 연구자는 "임신부가 조심할 약품과 재료에 관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며 "관련 기준이 있으면 실험할 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산부 연구자가 소수지만 소속기관에서 별도로 안전 관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설문 결과, 응답자의 76%(315명)가 임신 중 유해물질을 다룬 경험이 있으며 73%(300명)는 소속기관에서 임신부를 위한 실험실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

전체 설문결과는 BRIC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이번 설문에 기업 머크(MERCK)가 후원했다. 머크와 주최기관은 현재 임신부 연구자 전용 실험복 증정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 산학연 임신 경험 연구자들의 이야기

-충남대학교 M 연구교수 : 현재 21개월, 초1, 초2 아이의 엄마입니다. 임신기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출산 후가 더 문제죠.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지 등이 걱정이었어요. 단축근무제도가 정말 필요합니다. 소속기관에 어린이집이 있지만 계약직은 이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점이 개선됐으면 좋겠고 돌봄교실도 확대되길 바랍니다.

-국가연구기관 N 연구원 : 계약직 연구원으로 10여 년 지내다가 학위 과정을 밟게 되면서 고용보험에서 제외됐다. 그 가운데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어서 출산휴가, 조기퇴근, 육아휴직, 휴직 중 급여 등의 지원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없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포함해 4개월 정도 쉬었다. 팀에서 양해를 해줘서 가능했지만, 정식 절차가 아니어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했다. 학생 연구원에게도 임신과 출산 혜택을 의무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대전 중소기업 O 연구원 : 중소기업 연구소에서 5년째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중소기업에는 인력이 많지 않아 임신 초기와 말기에 근로시간 단축제를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회사에 여성 연구원 비율이 높지만, 대다수 남성 운영진들은 임산부를 배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하다. 육아휴직을 사용한 여성 직원이 한 명도 없고 어쩔 수 없이 퇴사하는 분들이 허다하다. 새로운 정책보다는 지금 있는 제도만이라도 잘 지켜지면 좋겠다. 임산부 직원 대상 단축근무와 육아휴직 사용률이 전혀 없는 기업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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