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탄소섬유 융설도로 개발 범부처 연구 중단
"국민 안전 담보 연구개발, 체계적-안정적 연구지원 중요"

'도로 위 암살자'로 불리는 블랙아이스. 최근 7명의 목숨과 39명의 사상자를 낸 상주-영천 고속도로 블랙아이스 사고는 처음이 아니다. 연례행사처럼 매년 터지고 있다. 

블랙아이스로 인한 인명피해 사고는 차고도 넘친다. 십수 년 사이 수백 명이 사망했다. 앞으로도 당분간 블랙아이스 사고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수십 년간 계속돼 온 고질적인 사고는 대개 과학기술계에서도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연구자는 연구를 시도하지만, 그 뒷모습은 겨울철 눈이 녹듯 고요하게 사라진다. 블랙아이스 관련 직접적인 연구가 그랬다. 

16일 과학기술계 및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에 따르면 전국적인 상습 결빙 도로를 대상으로 눈을 녹게 하는 융설(融雪)도로 다부처 공동개발 사업을 추진했으나 3년 전 중단된 것으로 확인됐다.

열선 도로용 탄소섬유 발열체 개발을 위한 다부처 공동개발사업 기획과제가 3년간 추진된 바 있다. 당시 미래창조과학부를 비롯해 국토부, 산업자원부 등이 주관한 사업이다. 

한국화학연구원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등 4개 기관 연구진이 관련 연구를 주도했다. 

화학연은 원유를 증류할 때 남는 찌꺼기 피치(petroleum pitch)를 탄소섬유화시키는 합성 연구를 주도했으며, 생기원은 합성된 피치로 탄소섬유화하는 연구를 추진했다. 기초지원연은 융설도로 시뮬레이션 분석연구에 동참했고, 건설연은 개발된 탄소섬유 융설도로를 가지고 도로포장을 실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연구진은 당시 열선 재료를 직접 만들어 도로 위 얼음이 녹는 것까지 실험 증명을 해 보였으며, 전라남도와 세종시 등 각 지자체들의 연구개발 사업 참여 의사까지 확인받았다. 

그러나 2016년 당시 방범용 드론개발 사업과 인공장기 3D 프린팅 개발사업에 밀려 기획과제 이후 최종 평가에서 낙마해 연구개발 활동이 중단됐다. 

연구에 참여했던 K 과학자는 "기획과제를 했을 때만 해도 겨울철이고 인천공항에서 블랙아이스 대형사고가 발생해 무리 없이 추진됐지만, 여름철에 진행된 최종 평가에서 이슈가 식어서인지 후속 연구평가에서 낙마했다"고 당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다른 연구원의 L 연구자는 "부처 간 공동사업이다 보니 평가에서 나중에 어느 부처 성과인지 중요시 여긴 것이 안타까웠다"라며 "각 부처에서 자기 부처의 성과로 비치길 바라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 안전을 담보로 하는 연구는 부처 이기주의에 의한 평가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P 연구원은 "당시 연구자료가 존재하고, 최근 블랙아이스 대형사고로 지금 당장 탄력을 받아 연구개발이 추진될 수 있겠지만, 겨울철에 잠깐 이슈화되고 6개월 후 여름이 되면 눈 녹듯 하는 작금의 연구개발 문화적 배경은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일갈했다. 

◆ 출연연, 도로 사고 관련 기술개발 한창

건설연은 경기도 연천 지역에 기상재현 실증센터를 세워 블랙아이스 등 외부 환경에 따른 시뮬레이션 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건설연은 경기도 연천 지역에 기상재현 실증센터를 세워 블랙아이스 등 외부 환경에 따른 시뮬레이션 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경기도 연천 지역의 건설연 기상재현 실증센터에선 눈, 비 등 날씨를 인공적으로 구현해 도로 안전 관련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사진=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경기도 연천 지역의 건설연 기상재현 실증센터에선 눈, 비 등 날씨를 인공적으로 구현해 도로 안전 관련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사진=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블랙아이스 이슈가 커지자 과학기술계에서 관련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출연연 중 도로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설연은 다양한 인프라 구축과 연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연천지역에 기상재현 실증센터를 세워 블랙아이스 등 외부환경에 따른 시뮬레이션 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안개 상태뿐만 아니라 눈, 비 등 여러 날씨 상태를 인공적으로 구현하면서 도로 안전 관련 연구개발을 추진 중이다. 

특히 건설연은 최근 블랙아이스와 같은 겨울철 도로결빙 위험을 대비하는 기술을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차량에 부착된 관측장비로 외부 온도 데이터를 수집하고,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된 노면 결빙 위험 정보를 운전자에게 실시간으로 제공해 주는 기술이다. 

건설연의 '노면온도변화 패턴 예측 모형'은 플랫폼으로 전송된 정보와 기상청이 공개적으로 제공하는 날씨정보, 기존 위치별 도로조건 등 다양한 조건을 연계해 기계학습(머신 러닝) 기반 모형으로 노면온도 변화 패턴을 예측한다. 이를 통해 운전자는 도로결빙 등과 같은 노면위험 예측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게 된다. 건설연은 응용SW 전문기업 아이나비시스템즈의 모회사인 팅크웨어와 협력해 기술 시범 적용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노면온도 변화 패턴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사진=건설연 제공>
국내 연구진이 노면온도 변화 패턴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사진=건설연 제공>
ETRI는 도로 사고가 났을 경우 운전자가 의식이 없어도 자동으로 긴급구난 서비스를 출동시킬 수 있는 eCall 시스템을 개발했다. 자동차 블랙박스나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등의 센서를 이용해 사고가 나면 중대사고를 스스로 판단해 자동으로 구조신고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현재 교통안전공단에 등록돼 실시간 모니터링 중인 위험물 운송차량 1만5000대를 대상으로 시범 적용하고 있으며, 단계별로 확대해 전체 위험물 차량에 eCall 시스템을 장착할 예정이다. 

eCall 시스템은 택배회사처럼 개별 관제시스템을 갖춘 상태에서 가동할 수 있으며, 전 국민 대상으로 시스템을 적용할 경우 국토부 등 정부 부처의 제도 운영 지침이 마련돼야 한다. 연구진은 이를 위한 국제기술표준과 국내 표준을 확립해 놓은 상태다. 

과학정책 한 전문가는 "블랙아이스 교통사고처럼 우리 주변에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가 상당하고 그와 관련해 많은 연구개발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관련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하거나 비전문성, 부처 간 이기주의에 묻혀 꽃을 못 피우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하루빨리 국가적 재난 및 사고 관련 연구개발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체계적으로 제도권으로 흡수될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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