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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제임스와트 증기기관 특허, 산업혁명 씨앗 뿌리다

上편 - 글 :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제임스 와트는 1769년 1월 5일 증기기관에 관한 특허를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1년 전입니다. 산업혁명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증기기관이 상업적 모델로 완성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와트는 현대적 의미의 엔젤 투자가, 벤처 투자가, 그리고 기업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장 가도에서 짝퉁과 특허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정성창 소장은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과 사업화 과정을 기업사적 관점에서 기고글을 연재합니다. <上>제임스와트 증기기관 특허, 산업혁명 씨앗 뿌리다(연구개발 과정, 특허 확보) <下>증기기관 산업화 과정과 오늘날의 교훈 순입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자 편지>

2020년은 제임스 와트가 1769년 1월 5일 증기기관에 관한 특허를 받은지 251년이 되는 해다. 증기기관은 인류 문명사적으로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다. <사진=Wikipedia>2020년은 제임스 와트가 1769년 1월 5일 증기기관에 관한 특허를 받은지 251년이 되는 해다. 증기기관은 인류 문명사적으로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다. <사진=Wikipedia>

16~18세기 영국에서 석탄은 가정용 난방뿐만 아니라 산업용 연료로도 그 사용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영국의 춥고 습한 기후조건이 영향을 미쳤다. 석탄은 철광석에서 철을 추출하고 소금과 유리 제조 공정에서 높은 열을 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석탄은 가정용 난방과 요리를 위한 연료로 목재를 대체하고 있었다.
 
석탄 수요가 늘어나면서 석탄 채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광부들은 점점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갔다. 땅속 깊이 내려갈수록 지하수의 물이 갱도로 흘러들어오는 등 침수 문제가 발생했다. 침수 문제는 석탄 채굴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의 위험성도 높아지게 했다. 

당시 광산에서는 가족 전체가 채굴 작업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지하 깊은 곳에서 남편은 채굴하고 아내와 아이들은 부서지거나 가루로 된 광물을 운반했다. 가족 전체가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광산주와 광부와의 노동계약은 석탄 채굴량을 미리 합의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속된 기간 내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광부들은 아내와 아이들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갱도의 침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석탄 채굴의 경제성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광부 개인의 생명과 광부의 아내와 아이를 포함한 가족 전체의 생명을 구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와트 이전의 증기기관과 상용화 시도

광산의 갱도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 초기에는 말의 힘이 이용되었다. 광산이 깊어지면서 말을 이용해서 물을 퍼 올리는 작업은 한계에 도달했다. 다음은 증기를 이용하여 양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졌다. 1561년에서 1688년 사이에 발행된 특허 317건 중에서 14%에 해당하는 43건이 광산의 배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발명가들이 당시 광산에서 물을 퍼 올리는 기계를 발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698년 세이버리(Thomas Savery, 1650–1715)는 최초로 석탄을 이용한 증기 펌프를 발명하였다. 세이버리 펌프는 10m의 물을 퍼 올릴 정도였다. 그는 특허를 따고 자신의 발명을 '광부의 친구'(Miner's Friend)라고 부르며 마케팅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은 세이버리의 펌프보다 뛰어난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뉴커먼 기관은 양수 용량이 크고 50m 정도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뉴커먼은 세이버리의 특허를 침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허를 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1712년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세이버리의 특허로 보호되는 뉴커먼 증기기관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제조업체나 광산주에게 증기엔진 1기당 특허 라이선스 요금으로 연간 300파운드 정도를 받았다. 당시 잉글랜드의 1인당 GDP가 20~30파운드 정도임을 고려하면 꽤 괜찮은 비즈니스였다. 세이버리와 뉴커먼 증기기관은 특허가 만료되는 1733년까지 104대가 설치되었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증기기관 개량에 착수 

뉴커먼 엔진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결점은 낮은 효율성이었다. 이 증기기관은 크고 무거웠으며 소모되는 석탄의 양이 너무 많아 널리 보급되기 어려웠다. 석탄 광산의 소유주나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뉴커먼 엔진의 결점을 알아차린 사람은 글래스고 대학교의 구내 기계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였다. 

글래스고는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역에 있는 지방으로 런던에서 북쪽으로 660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당시 글래스고 대학은 훗날 미국 공과대학의 모형이 되는 대학으로 평가될 정도로 실용적인 연구와 학풍으로 명성이 높았다. 

일자리를 찾고 있던 와트에게 글래스고 대학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대학 구내에서 실험기구 등을 제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것은 대학 측이 뛰어난 실험기구 제작자를 찾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글래스고 대학이 학문이나 연구자에 대해 개방적 문화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일하면서 유명한 화학자인 조셉 블랙(Joseph Black, 1728–1799)을 알게 되었다. 블랙은 물이 증기로 변하는 열량에 관한 연구, 즉 잠열(潛熱) 연구를 하면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당시 와트는 1763년 무렵부터 물리 실험용으로 사용되던 뉴커먼 증기기관 모형의 수리를 하게 되었다. 뉴커먼 증기기관은 당시로는 최첨단 기계였으며 당시 영국의 어느 대학도 실험용으로 뉴커먼 기관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뉴커먼 엔진을 수리하면서 와트는 가열한 실린더에 물을 뿌려서 수증기를 수축시키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 즉 블랙이 말한 잠열이 크게 손실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트는 더워진 증기를 냉각시키고 다시 데우는 낭비를 막기 위하여 항상 증기를 축적하고 압축할 수 있는 응축기를 별도로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를 모형으로 제작하는 작업조차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기계공업, 특히 글래스고 지역에서는 와트가 생각하는 수준의 정밀한 실린더와 피스톤을 만들 수 있는 직공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늘어나는 연구비의 조달이었다.

◆와트, 한계 극복하고 1769년 특허 확보하다

와트는 증기기관의 개량을 위한 초기 4년 동안의 연구에 자신의 사비로 1200파운드를 투자했다. 당시 런던의 사무직 연봉이 100 파운드 정도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빚도 늘어났다. 와트는 생활비를 벌고 빚을 갚기 위하여 증기기관 연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와트의 증기기관 연구에 자금을 댄 것은 사업가 존 로벅(John Roebuck, 1718~1794)이었다. 

로벅은 스코틀랜드의 캐런(Carren) 강 근처에서 캐런 제철소(Carron Iron works)를 경영하고 있었다. 1766년경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의 교수인 블랙의 소개로 로벅을 만나게 되었다. 로벅은 탄광의 채굴권을 갓 따낸 시점이어서 강력한 증기기관을 찾고 있던 차였다. 그는 와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증기기관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로벅은 와트의 부채 1000파운드를 떠맡고 증기기관의 상업화에 필요한 자금과 특허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대신 특허권 수익의 2/3는 자신이 가진다고 제안했다. 와트는 로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계약으로 인해 와트는 비로소 비즈니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로벅은 와트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작업장도 제공했다. 이 작업장은 오늘날의 연구소에 해당한다. 로벅은 와트의 연구 내용이 산업 스파이에게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저택 근처에 작업장을 마련하도록 했다.

1768년 와트는 응축기가 달린 새로운 증기기관의 실물 모형을 완성하였다. 로벅은 약속한 대로 특허 확보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와트는 1769년 1월 5일,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특허를 확보했다. 

와트가 살던 당시에는 특허 한 건을 따내기 위해서 현재의 화폐 가치로 수억 원이 필요했다. 당시 특허 신청 절차는 번거롭고 복잡했다. 오늘날의 특허청과 같은 관청도 없었고 심사관도 없었다. 우편으로조차도 특허 신청을 할 수 없었다. 발명가가 런던에 가서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10개 정도에 이르는 관청에 직접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이런 번거로운 절차는 와트뿐만 아니라 다른 발명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허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명세서 작성이었다. 특허 명세서란 발명의 작동 원리와 응용 분야 등을 상세하게 작성한 문서로 특허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서류이자 법적으로 가장 중요한 서류였다. 이 당시 영국 사회에는 '특허란 사회에 유용한 지식을 공개하고 그 대가로 독점을 받는 것'이라는 특허제도의 사회계약설이 정착되어 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발명가는 자신이 발명한 내용이 특허 명세서에 잘 나타나도록 쓰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아직 변리사라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명가들은 직접 명세서를 쓰거나 기술과 법을 아는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특허 명세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서 나중에 소송에서 무효가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와트는 자신의 친구인 스몰(Dr. William Small, 1734–75)의 조언과 도움을 받으면서 훗날 발생할 잠재적인 해적 업체에 대항하기 위한 명세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와트의 특허 명세서 작성을 도와준 스몰은 의사이자 자연철학 교수로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멘토이기도 했으며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이었다.

下편에서 계속됩니다.

◆기고자 약력

정성창 연구소장은 1998년 기술고시에 합격한 이후 특허청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특허청 산업재산 인력과장, 창의발명교육과장, 산업재산활용과장 등을 거치면서 연구개발에서 특허 정보 활용, 산학협력, 지식재산 금융, 지식재산 전문인재 양성 등의 정책에 관여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 대전에서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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