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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증기기관 산업화 과정과 오늘날의 교훈

下편 - 글 :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제임스 와트는 1769년 1월 5일 증기기관에 관한 특허를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1년 전입니다. 산업혁명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증기기관이 상업적 모델로 완성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와트는 현대적 의미의 엔젤 투자가, 벤처 투자가, 그리고 기업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장 가도에서 짝퉁과 특허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정성창 소장은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과 사업화 과정을 기업사적 관점에서 기고글을 연재합니다. <상>제임스와트 증기기관 특허, 산업혁명 씨앗 뿌리다(연구개발 과정, 특허 확보) <하>증기기관 산업화 과정과 오늘날의 교훈 순입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자 편지>

제임스 와트는 1769년에 특허를 확보하고 난 후 첫 증기기관을 탄광에 설치하였다. 불행하게도 1호 증기기관은 실패했다. 당시 로벅이 운영하던 캐런 제철소 기술로는 와트가 요구하는 실린더, 피스톤, 나사, 기어 등의 규격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던 로벅은 자금난이 가중되어 1773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와트는 측량기사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의 성공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마저 사망했다. 와트는 절망했다. 그러나 와트가 버밍햄의 산업자본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 1728~1809)을 만나면서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와트가 볼턴을 만나면서 주 무대가 글래스고 지역에서 버밍햄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버밍햄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도시이다. 산업혁명 당시 버밍햄은 금속, 기계, 공작기계 산업이 발달했으며 주변에는 실력 있는 기계공, 직공 등이 많았다. 

와트는 글래스고에서 구할 수 없었던 정밀한 피스톤, 나사 등을 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와트의 1769년 특허 명세서 작성을 도와준 스몰이 볼턴과 함께 루너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를 운영하고 있었다. 

루너 소사이어티는 보름달이 뜨는 날 만난다는 의미로 이 모임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계몽사상가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측정 기구, 운하 건설 등과 같은 과학 지식에 대하여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미국의 제퍼슨 등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와트 또한 이 모임에 참가함으로 인해서 증기기관에 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루너 소사이어티는 볼턴의 저택인 소호 하우스(Soho House)에서 열렸다. 소호는 마을 이름이며, 이곳에는 유럽의 최대 공장인 소호 제작소(Soho Manufacture)가 있었다. 볼턴은 바로 이 소호 제작소의 공장주로 지금으로 보면 기업가였다. 

◆ 성장궤도에서 짝퉁을 만나다

볼턴은 로벅과 와트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로벅은 파산 당시 볼턴에게 1200파운드의 빚이 있었고 와트는 증기기관 특허를 딸 당시 볼턴의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볼턴은 로벅의 파산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볼턴은 로벅에게 1200파운드의 빚을 탕감해 주고 나중에 엔진판매로 수익이 나면 1000파운드를 더 주기로 했다. 대신에 와트의 특허지분을 인수했다. 

1774년 볼턴과 와트는 '볼턴 앤 와트'를 설립하고 증기기관의 본격적인 사업화에 착수했다. 두 사람의 성격과 능력은 모든 면에서 상호 보완적이어서 환상적인 팀이었다. 볼턴은 비즈니스 경험이 풍부하였고 자금 조달에 뛰어났다. 와트는 기계에 관한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의 약점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볼턴은 경영을 맡았고 와트는 증기기관의 디자인, 제조 그리고 설치 등을 감독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기업 설립 이후 첫 공동 작업 중 하나로 증기기관 특허의 보호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와트의 특허는 1783년 만료될 예정이었다. 특허 보호 기간은 14년으로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는 이미 6년이 지나 버린 상태였다. 증기기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이대로 두면 새로운 증기기관을 완성하더라도 특허 보호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아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증기기관의 완성만큼이나 특허 기간 연장이 경영전략 측면에서 중요한 판단이었다. 1775년 와트와 볼턴은 서로 협력하여 증기기관 특허를 25년이나 더 연장하여 1800년까지 특허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볼턴과 와트는 성능이 뛰어난 증기기관 엔진을 개발하기 위하여 개량 연구에 매진했다. 

볼턴은 와트에게 증기기관이 수직 운동에서 회전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계 장치를 개발하도록 요청했다. 증기기관이 회전운동을 하게 되면 광산에서의 펌프 용도를 넘어 방직공장을 비롯한 다른 공장에도 응용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증기기관의 시장 수요가 확대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와트는 볼턴의 의견을 수용하여 증기기관에 대한 개량을 거듭하여 1775년에서 1785년까지 다섯 개의 특허를 더 확보했다.

◆ 대성공 그리고 짝퉁과의 전쟁

와트의 증기기관은 대성공이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1776년 석탄 광산에 최초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설치되었다. 볼턴의 소호 공장은 엔진 밸브와 같은 중요한 부품만을 제작하고 나머지 부분은 제조업자에게 맡겼다. 대신에 볼턴과 와트는 엔진을 설치하는 엔지니어를 훈련 시켜 품질관리에 정성을 쏟았다. 기존의 뉴커먼 증기기관 판매 기업은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엔진 제조와 판매에서 이익은 크게 나지 않았고 알짜 수익은 증기기관의 사용자에게서 나왔다. 볼턴과 와트는 새로운 증기기관 사용에 따른 연료비 절감 금액의 일정 부분을 라이선스 요금으로 받았다. 예를 들면 뉴커먼 증기기관 사용 시 1일 연료 비용은 14.7 파운드였다. 와트의 증기기관을 사용하면 1일 연료 비용은 6.9 파운드였다. 광산주에게 연료비 절감액은 하루 7.8파운드였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광산주에게는 약 2천 파운드가 절감되었다. 

와트와 볼턴은 이 2000 파운드 중 일부를 라이선스 요금으로 매겼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뉴커먼 기관과 비교할 때 초기 설치 비용도 저렴했다. 1783년이 되면 탄광이 밀집된 콘월 지역에서는 와트의 증기기관 설치 대수가 뉴커먼 증기기관 대수를 앞질렀다. 와트 증기기관의 이러한 경제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광산주들 일부는 라이선스 요금이 비싸다고 요금 지급을 거부했다. 

한편에선 볼턴과 와트로부터 위탁받아 증기기관을 제조하는 기업들은 기술 역량이 쌓이면서 짝퉁 기관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또한, 와트의 증기기관을 개량하여 판매하는 추격형 모방 기업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와트의 특허를 침해하고 있는 것은 똑같았다. 

와트는 특허소송의 비용과 패소 가능성 때문에 이들 업체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망설였다. 1780년대에는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고 '특허를 침해하는 기업들은 소송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대처했다. 모방 기업들은 와트가 허풍을 치고 있다며 반박하고 특허소송을 하면 무효가 될 것이라고 했다. 라이선스 요금을 내지 않겠다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와트는 모방 기업을 대상으로 특허소송을 결정했다. 와트가 특허 침해라고 주장하자 상대측은 와트의 특허 명세서가 부실하다며 특허 무효를 주장했다. 

수년에 걸친 소송 끝에 법원은 와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소송에서 이김으로 인해서 '볼턴 앤 와트'는 3만 파운드의 라이선스료를 받게 되었다. 1790년경에 이르면 와트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11년 동안 특허권 사용료로 받은 금액이 7만 6000 파운드(2010년 기준으로 9300만 파운드)에 달하였다. 볼턴 앤 와트는 1775년에서 특허 기간이 만료되는 1800년까지 총 496대의 엔진을 건설하였다. 이들 중 164대는 양수용이었고 308대는 기계 구동을 위한 것으로 주로 회전형 엔진이었다. 이들 회전형 엔진은 주로 방직산업에 사용되었다. 방직산업은 증기기관을 사용한 최초의 산업 분야였으며 공장제도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산업이기도 했다. 

◆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와트와 볼턴의 전략적 행동을 오늘날 기술벤처의 태동과 성장 전략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운 수요, 즉 석탄 산업과 성장하는 방직산업에서 증기기관의 필요성을 내다보고 실패의 위험성이 높았지만 과감한 신기술에 투자했다. 

둘째, 연구 초기와 사업화 단계에서 특허권 지분을 매개로 하여 모험자본을 유치하고 기업가를 끌어들여 CTO와 CEO의 역할을 나누고 전문화했다. 로벅은 오늘날의 엔젤 투자가에 해당하며 볼턴은 벤처투자가이자 기업가, 그리고 와트는 CTO였다. 

셋째, 제조와 판매 단계에서 핵심부품은 직접 제조하고 비핵심부품의 제조와 설치는 외부 업체에 위탁했다. 그리고 엔지니어 교육을 통하여 품질관리를 했다. 현대 기업의 경영과 비슷한 경영전략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넷째, 짝퉁 업체의 등장을 예측하고 초기부터 튼튼한 특허를 만들고 대비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기업의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와트의 증기기관 사례는 오늘날의 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가 벤처 고전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과 유럽 시장은 이러한 벤처 고전을 학습한 기업가들이 활동하는 무대다. 법과 같은 공식적 제도는 그나마 배우기가 쉽지만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문화는 배우기 어렵다. 해외로 진출하는 우리 기업이 와트의 증기기관 사례를 통하여 영미 기업의 비즈니스 문화와 지식재산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고자 약력

정성창 연구소장은 1998년 기술고시에 합격한 이후 특허청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특허청 산업재산 인력과장, 창의발명교육과장, 산업재산활용과장 등을 거치면서 연구개발에서 특허 정보 활용, 산학협력, 지식재산 금융, 지식재산 전문인재 양성 등의 정책에 관여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 대전에서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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