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에디슨, 미국 과학계의 소통과 협력을 위한 ‘사이언스’ 창간
대전과학산업진흥원, 대덕 구성원간 협업 프로젝트 추진 필요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고 4월은 '과학의 달'이다. 매년 이 맘쯤이면 전국 각지에서 각종 과학행사가 진행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이벤트가 활발하다. 콘텐츠는 더욱 풍부해진 듯하다. 생물, 우주, 공룡 등 재미난 주제와 과학자나 발명가들 이야기도 많이 보인다. 

과학의 달,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에디슨이다. 그는 1999년 12월 31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이 지난 천년의 역사에서 각 세기를 대표하는 인물 선정에서 19세기 대표자로 꼽힐 정도다. 에디슨은 흔히 1093건의 특허와 백열전구를 상용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발명 중 백미는 백열전구의 대나무 필라멘트 소재 발견이다. 

◆ 백열전구의 필라멘트 실험

에디슨이 백열전구에 착수하기 시작한 것은 1878년 가을부터였다. 실험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에디슨 이전에 백열전구에 도전한 과학자, 발명자가 경험한 실패의 전철을 그도 따라 하고 있었다. 

백금, 이리듐 등 희귀 금속 등 주기율표에 따라 융점이 높고 필라멘트로 가공하기 좋은 모든 소재를 시험해봤다. 필라멘트 모양도 다르게 해 보고 유리 전구 안의 진공상태, 가스 종류도 바꾸어봤다. 

1879년 10월 21일, 그날은 평범한 무명실을 탄화시킨 필라멘트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늦은 밤 시작한 무명실 탄화 필라멘트는 새벽 6시를 넘어 아침이 돼서도 불빛을 밝혔다.

그날 밤 내내 에디슨과 연구원들은 노심초사하면서 연소반응을 지켜봤다. 13시간 반이 지나서야 전구는 깨지고 빛은 멈췄다.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운 지 근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에디슨과 먼로파크의 연구원들은 환호를 질렀다. 그들은 연구실을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서로에게 축하를 보내고 격려했다. 소년 조수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에디슨은 연구의 가닥을 잡았다고 확신했다. 이후에도 실험은 1년이나 더 계속됐고 6천번의 실험 끝에 2450시간이나 전깃불을 밝히는 일본산 대나무 필라멘트를 발견했다. 

◆ 사이언스(Science) 창간

1879년 12월 31일, 에디슨은 먼로파크에서 백열전구 시연회를 개최했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날리고 바람이 불어 추운 날씨였지만 전국에서 3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 신사도 있고 농부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밝고 하얀빛이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그들은 외쳤다. '에디슨 만세'. 이 소식은 대서양을 건너 과학 종주국인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퍼졌다. 

영국의 네이처(Nature)는 '건전한 과학지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중적인 쇼'라고 에디슨을 맹비난했다. 프랑스의 한 과학저널은 '유럽의 동료들은 에디슨이 60개의 백열전구에 불을 밝힐 때까지 칭찬을 멈추어 달라'며 '네이처'의 편에 섰다. 유럽인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개도국 미국의 발명가가 해냈다는 사실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미국의 과학계는 수준이 낮았고 권위 있는 학자도 없던 시절이었다. 에디슨은 과학 기반이 얕은 나라가 받는 서러움으로 느꼈다. 1년 내내 불면의 날을 보내면서 실험을 했는데 칭찬은커녕 '과학지식이 없는 대중적 쇼'라고 비난을 받았으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에디슨은 이후 미국도 네이처와 같은 과학잡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 자신도 발명가이자 과학자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1880년 봄, 에디슨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과학전문 언론인 미첼스(John Michels)가 '네이처'와 같은 과학저널을 운영해 보겠다고 나섰다. 에디슨은 흔쾌히 수락하고 사무실 운영과 각종 비용을 지원했다. 두 사람은 이 새로운 저널의 이름을 '네이처 아메리카' 등으로 검토하다가 '사이언스'로 확정했다.

1880년 7월 3일 에디슨이 발행인, 미첼스가 편집장이 되어 '사이언스' 창간호를 발행했다. 19세기 후반 과학토양이 척박한 미국에서 '사이언스'는 순탄하지 않았다. 에디슨의 뒤를 이어 전화기를 발명한 벨도 후원했으나 '사이언스'는 폐간과 재창간을 반복했다. 제 궤도에 오른 것은 창간 이후 20년이 지난 1900년, 미국과학진흥협회(AAAS)가 인수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이언스는 네이처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저널이지만 시작은 미미했다.

◆ '대전과학산업진흥원'에 대한 기대

에디슨은 '사이언스' 창간을 통해서 과학자가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더 큰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최근 대덕넷은 과학기술계에 일침을 놓고 산학협력에서 원팀을 강조하며 과학기술계에 협력을 제안했다. 에디슨과 대덕넷은 소통과 더 큰 세계를 구현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나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대덕넷의 메시지를 이어서 협력과 소통을 어떻게 해 나갈지 또 누가 해 갈지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때마침 대전시가 대덕 특구의 도약을 위해 '대전과학산업진흥원(DISTEP)'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대가 크다. 세 가지를 건의 드린다. 

첫째, 대덕의 연구기관, 대학 등 구성원간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내 국가경쟁력에 이바지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주길 바란다. 백 마디의 말, 구호보다 하나의 행동이 훨씬 더 낫다. 

둘째, 대한민국 전체 사회에 '과학과 혁신을 위한 문화'를 발신하도록 해 주길 건의한다. 대전이 중심이 되고 모범이 되어 전국의 도시가 따라 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과학과 혁신을 따라 할 수 있는 '롤 모델'을 발굴하고 전파해 주길 건의한다. 대덕 특구가 50살의 나이에 접어드는데 '롤 모델'이 없을 턱이 없다. 내년 이맘쯤 과학의 달, 늦은 밤 불 켜진 연구소에서 에디슨의 후예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대한다. 단, 주 52시간 근무제가 해결된 이후에 말이다.

◆ 기고자 약력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사진=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 제공>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사진=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 제공>
필자는 대전에서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기업의 혁신전략, 지역 생태계, 산업 혁명과 기술혁신, 제도와 기업가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신산업과 지식정보혁명(2001, 공저)', '지식재산 전쟁(삼성경제연구소, 2005, 단독)', '기업 간 추격의 경제학(2008, 공저)'등이 있다. 필자와 교신하고 싶은 사람은 ipnomics@hanmail.net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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