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2030⑤]이택민 기계연 박사
공정·장비 만들고 학회·협회·표준 제정 힘써
"출연연은 국가대표, 선도한다는 마음으로"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회에 거의 유일하게 있던 한국인, 이택민 박사는 인쇄전자 분야 한 획을 그었다. 예컨대 지금의 인쇄전자 기술은 디스플레이, 자동차 배터리, 태양전지, 전자부품 등에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현대 산업을 이끄는 기술 중 하나가 인쇄전자 기술인 셈이다.
이 박사는 국내 인쇄전자 전문가들과 함께 관련 협회와 학회를 만들고 국제표준화기구(IEC)에 인쇄전자 분과를 제안, 발족시켰다. 대한민국 제안으로 만들어진 첫 표준위원회로, 전 세계 과학자들과 함께 인쇄전자 분야 국제표준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특히 그는 장비 분과의 분과장을 지금까지 약 10년째 맡고 있다. 인쇄전자 기술 분야에선 한국이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해있다.
◆ 황무지에서 선두주자로
이 박사가 입사하던 당시, 연구실은 이제 막 인쇄전자 기술을 실제 적용해보려 시도 중이었다. 그는 미세하고 정교한 인쇄 패터닝 기술과 공정 메커니즘 연구에 집중했다. 그 결과 롤투롤 인쇄전자장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두루마리 휴지와 같은 롤러에 전자소자를 인쇄하는 기술이다. 이 롤투롤 인쇄 공정·장비가 현재 대부분 산업의 핵심 기술이 됐다.
총 3어억원의 정액기술료, 300건의 국내외 특허 출원, 70여편의 SCI급 논문 등 한눈에 봐도 상당한 숫자가 그의 지난 연구생활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으로 그는 수상경력을 꼽았다. 한국유연인쇄전자학회 학회장상과 한국플렉시블일렉트로닉스산업협회 협회장상이다.
"이 상들은 각 학회와 협회가 생길 때 처음으로 받은 초대 상들이에요. 발족에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은 거죠. 실제로 정관 수립부터 제가 참여했었어요. 그 정도로 국내는 이 분야에 있어서 황무지였죠. 연구뿐만 아니라 관련 학계와 산업계에 이바지하는 것도 제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이 박사는 인쇄전자가 미래산업에 꼭 필요한 기술이 되리라 확신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플렉시블일렉트로닉스산업협회의 역대 협회장 중엔 김기남 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도 있다. 당시 김 회장도 이 박사와 같이 인쇄전자기술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것으로 알려진다. 이제까지 이 박사가 직간접적으로 한 시험검사만 400건 이상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 박사는 3년여 전부터 인쇄전자기술에 인공지능(AI)과 디지털트윈, 나아가 양자를 접목하는데 도전하고 있다. 이미 공정현장을 디지털트윈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개척하길 망설이지 않는 모습은 "MIT의 도전적인 연구문화에 흠뻑 젖었었다"던 20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인쇄전자 분야가 소재, 전자공학,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다양한 기술이 융합되는 분야예요. 계속 공부하고 도전해야 하죠. 그런 점에서 저랑 잘 맞아요. 지난 20년간 새로운 걸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게 저로선 재밌었죠. AI, 양자를 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해보려고요. 앞으로가 더 재밌을 거 같아요. 물론 후배들은 이런 저를 살짝 귀찮아하는 거 같긴 하지만요(웃음)."
◆ "출연연이라면···국가대표급 사명감으로"
"연구과정을 1년 반, 1년으로 단축하면 아웃풋이 많아질 텐데 왜 안될까 생각해봤어요. 아이디어를 끝까지 못 가져가기 때문이더라고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어요. 용기가 부족해서, 과감하지 못해서, 시스템이 따라주지 않아서 등이죠. 어떻게든 끌고 가려면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야 해요. 여기엔 물적·인적 자원을 빼놓을 수 없죠."
물적 자원의 경우 이 박사는 극복했다. 20년간 인쇄전자 분야의 필요성을 부각하며 다양한 연구과제를 수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인적 자원이다. 아이디어를 함께 구현해 줄 연구원은 물론, 과제가 많아지며 생긴 행정 업무를 소화할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연구원들이 연구를 하기 위해 주말, 밤에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웃픈 현실을 이 박사도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연구에 도전하려 해도 여유가 없고, 결국은 이런 상황들이 정신력을 약하게 만들죠. 의지도 꺾이고 심지어 아이디어를 잊어버리게 하기도 해요. 연구 생산성이 저하되는 가장 큰 문제죠."
이 박사가 20년째 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책임감 때문이다. '출연연 연구자는 국가대표'라는 사명감이다. 연구실장 직을 맡았던 시절, 연구원이 10명 안팎임에도 불구하고 행정직을 4명이나 채용한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출연연 연구자라면 그 분야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는 국가대표급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게 당연해요. 무슨무슨 연구실이라고 하면, 그 산업은 우리들이 선도한다는 마음으로 연구해야 하죠. 정부에서 어떠한 분야를 육성한다고 하면 당연스럽게 그 연구실을 찾아와야 할 정도로요. 저도 저희 연구실이 이 분야에선 최고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길도 잘 닦고 후배들의 연구를 보장해줘야죠.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이택민 박사 연구팀이 디지털트윈 기술로 구현한 롤투롤 인쇄전자장비. [영상=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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