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에디슨은 90년 전 10월 18일 여든네 살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영면한 날 후버 대통령은 고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조의를 표하기 위해 그날 밤 10시에 전국의 모든 전등을 잠시 끄자고 제안했습니다. 에디슨은 1093건의 특허를 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는 빛(백열전구), 소리(축음기), 시각(영사기)의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지난 2000년경부터 미국 등 선진국은 에디슨을 다시 조명하고 있습니다. '에디슨 붐' 현상에 대해 시드니 대학의 이안 윌스 교수는 혁신이 중요해지면서 에디슨이 '혁신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정성창 소장의 기고로 에디슨의 삶과 흔적 가운데 오늘날도 여전히 중요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에디슨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독서'다. 그는 독서를 통해 정보를 섭취하고 상상력을 발휘했으며 여가에도 독서를 즐겼다. 이런 독서 습관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에디슨은 어린 시절에 독서 습관을 갖도록 해준 어머니 낸시에게 늘 감사한다고 말했다.

◆바보 에디슨

에디슨은 오하이오주의 시골 마을 밀란에서 1847년 2월 11일 태어났다. 새뮤얼과 낸시 엘리엇의 7남매 중 막내로 에디슨이 태어났을 때, 가족들은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어릴 적 에디슨은 몸이 허약했고 질병이 잦았다. 그는 밀란에서 잠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의 유난히 큰 머리와 끝없는 질문 때문에 교사들은 그를 의아하게 여겼고 아이들은 '바보, 에디슨'이라고 놀렸다. 여섯 살 때 에디슨은 헛간에 불을 질렀다. 부친 새뮤얼이 왜 그랬는지 에디슨에게 물었다. 

에디슨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라고 대답했다. 에디슨의 대답에 새뮤얼은 분노했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 에디슨을 심하게 매질했다. 에디슨의 엉뚱한 행동은 친구의 죽음을 보게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에디슨은 한 친구와 개울가에서 물놀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친구가 사라졌다. 에디슨은 그 친구가 나타나기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에디슨은 어두워지자 더 오래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에디슨에게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이어 마을 사람 전체가 횃불을 들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은 개울가에서 그 아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에디슨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친구를 기다렸는지 설명했다. 에디슨은 훗날 이날의 사건을 '비극'이었다고 술회했다. 결국, 그는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아이 취급을 받게 되었고 학교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부친 새뮤얼은 어린 에디슨을 '멍청이'로 대했고 에디슨 자신도 '지진아'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유일한 선생님

부친 새뮤얼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비난받았다. 하지만 모친 낸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립학교의 평준화된 교육과 그런 교육의 결과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낸시는 전직 교사의 경험을 살리고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직접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결심했다. 에디슨은 이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어머니는 나를 만든 분입니다. 그녀는 너무나 진실했고 나를 믿어주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내가 절대로 실망을 안겨드려서는 안 되는 분이 있다면 그분도 어머니였습니다."

에디슨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운 것은 낸시 여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1912년 에디슨은 뉴저지 문법학교에서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좋은 책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위대한 문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이 초기 교육에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낸시 여사는 에디슨이 읽을 책들을 손수 골랐으며 같이 읽었다. 이런 과정이 4년 동안 이어졌다. 낸시 여사는 에디슨을 문학과 역사의 세계로 이끌고 다음으로 물리학의 세계로 안내했다. 물리학 공부를 어느 정도 이룬 뒤 그는 화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에디슨은 동네의 화학 약품을 모조리 모아 실험실에 가져다 놓은 뒤 실험실 문에는 '독극물'이라고 써 붙여놓았다.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이들 물질의 특성을 하나하나 실험해보았다. 에디슨이 이때 배우고 실험하며 깨우친 지식이 훗날 혁신의 자양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겠다

1860년대 후반 에디슨은 주로 전기와 전신, 음향, 화학 분야의 전문 서적을 탐독했다. 뉴턴(Newton)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 프린키피아)>에도 도전했으나 '지독하게 재미없는 책'이라고 회상했다. 에디슨이 뉴턴의<프린키피아>를 재미없는 책이라고 말한 이유는 수학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수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낸시는 훌륭한 교육자였으나 수학을 가르칠 능력까지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에디슨이 푹 빠진 것은 패러데이의 '전신실험 연구'였다. 패러데이는 자신의 실험을 일상적인 문장으로 상세하게 기록해놓았고, 그가 남긴 글에서는 수학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수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에디슨에게 패러데이의 책은 최고의 참고서였다. 에디슨은 패러데이를 롤 모델로 설정하여 자신의 미래를 그렸다. 에디슨은 이 귀중한 책들을 전신기사 생활을 하면서 머물던 지역의 국공립 도서관에서 입수했다. 디트로이트 청년협회 도서관(Detroit Young Men’s society Library), 기계도서관(Mechanical Library), 신시내티 자유 도서관(Cincinnati Free Library) 등이 에디슨에게 지식의 자양분을 공급했다. 

1851년 미국에는 694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에디슨은 이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으려고 결심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미국의 도서관은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도서관의 책을 다 읽으려 했다는 그 결심만으로도 에디슨이 얼마나 지식을 추구하고 갈망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평생을 함께한 책과 도서관 

어린 시절 형성된 에디슨의 독서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연구 도중에도 독서를 사랑했으며 이때도 역시 전공 서적만 읽은 것이 아니다. 인물 평전은 물론이고 연애소설도 즐겼다. 그의 책 사랑은 도서관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다. 에디슨은 30대 초반 자신의 연구소에 도서관을 세우고 500여 권의 책과 정기간행물을 사들였다. 출판물을 사느라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에디슨의 이런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에디슨이 돈을 물 쓰듯 펑펑 쓴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서관에 투자했다. 그의 도서관에는 기술과 과학 분야의 저널, 수많은 특허 문서가 빼곡히 자리 잡았다. 그는 또한 화학 연구자들을 위해 광물도 수집하여 전시했다. 에디슨은 연구를 위해서라면 구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찾아 읽었다. 어느 날 에디슨이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발견해내고 싶을 때 먼저 책을 찾아 읽습니다. 과거 누군가가 쓴 모든 것을 샅샅이 뒤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이 책들이 여기 있는 겁니다."

에디슨은 휴식을 위해 마련한 플로리다의 별장 안에도 서재를 만들었다. 에디슨은 이 휴가지에서도 독서를 즐겼다. 그는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그의 영감과 아이디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독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글: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이미지=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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