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AI를 보다下]패스트 팔로워 문제 제기
"지금은 그저 아이(AI)일 뿐, 퍼스트 무버 실현해야"
아직까지도 모래알 협업?···"협업 불씨를 산불로"

미국과 EU 등 선진국은 기본에 충실했다. 일찍이 원천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연구에 매진한 결과 지금의 과학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은 반세기 만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한국산 원천기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선진국들이 만들어놓은 기술을 빠르게 모방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추구한 결과다.

KISTEP(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2018 기술수준평가'에 따르면 한국은 주요국(미국·중국·일본·EU) 중 인공지능 응용개발 면에서 4위(5점 만점 3.85점)를 차지했다. 5위는 3.42점을 받은 일본이 자리했다. 반면 '기초 역량' 부문에선 한국이 3점을 받으며 5위에 안착했다. 일본은 4점으로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기초 역량 평가에서 5위를, 응용개발 부문에서 4위를 달성했다. [표=KISTEP 2018 기술수준평가]
한국은 기초 역량 평가에서 5위를, 응용개발 부문에서 4위를 달성했다. [표=KISTEP 2018 기술수준평가]
응용개발·기초 역량 평가는 평가전문위원들이 ▲탁월(5점) ▲우수(4점) ▲보통(3점) ▲미흡(2점) ▲부족(1점)으로 평균값을 산출한 결과다. 한국을 포함한 주요 5개국 모두 '부족'은 없다. '미흡'은 있다. 기초 역량 평가 부문에서 한국만이 유일하게 '미흡' 평가를 받았다. 

중국, 일본, EU 모두 "미국(혹은 선진국)을 추격 중"이라고 종합판단 돼 있다. 한국은 "인공지능 여러 분야에서 일부 우수한 성과를 보이지만 추격형 기술 개발이 상당수로 독보적으로 앞서는 연구는 미흡"이라고 적혀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인공지능에서조차 그간 한국의 원천기술 부재가 드러났다.

◆ 원천기술 부재

IBM에서 30여년을 몸담은 백옥기 ETRI 연구위원은 한국이 인공지능 원천기술 개발에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IBM은 연간 R&D(연구개발) 비용으로 6~10조가량을 쓴다. 원천기술 특허는 6만5000여개가 넘는다. 한국은 2020년 기준 R&D 비용이 24조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세계 1위다. 반면 인공지능 원천기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백 연구위원은 현재의 인공지능이 'Artificial Idiot'라고 했다. 원천기술 없이 타 기술을 모방하는 인공지능은 더 가봐야 아이(AI)일 뿐이라는 의미다. 그는 "천만번 가르치면 하나를 알고, 수학 문제 답의 원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4차 산업을 대신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백 연구위원은 아이(AI)가 아닌, 성인 AI를 위한 원천기술 확보에 나섰다. 과거 데이터를 그대로 현재를 대응하는 것이 아닌, 없는 답을 찾아내는 인공지능이다. 인간처럼 스스로 판단하는 인공지능을 의미한다. 

그는 인공지능 분야 세계적 석학인 요슈아 벤지오(Yoshua Bengio) 교수와 손잡았다. 벤지오 교수는 컴퓨터과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튜링 어워드 수상자이자 밀라(Mila)연구소 설립자다. 밀라연구소는 MIT(매사추세츠공과대), 하버드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북미 300여개 산∙학∙연을 망라한 국제 인공지능 컨소시엄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백옥기 연구위원은 혁신적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국제 인공지능 컨소시엄인 밀라연구소와 손잡았다. [사진=ETRI 제공]
(왼쪽에서 두 번째) 백옥기 연구위원은 혁신적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국제 인공지능 컨소시엄인 밀라연구소와 손잡았다. [사진=ETRI 제공]
백 연구위원은 당초 국제 협력이 아닌 '한국만의' 인공지능 원천기술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 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컨소시엄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는 "원천기술이 곧 국가 경쟁력인데, 한국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라며 "인공지능 원천기술 확보가 더는 밀려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 퍼스트 무버가 곧 디지털 시대를 좌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명준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끝났다"라고 일축했다. 인공지능 1등 국가를 위해 그가 꺼내든 전략도 바로 원천기술 확보다.

그는 "인공지능 핵심 원천기술 발굴은 한국 과학기술계 의무"라며 "원천기술이 궁극적으론 기업 기술이전·사업화로 이어져 국민에게 편의를 주고, 세계적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컬었다. 

정송 KAIST AI 대학원장은 인공지능을 5단 피라미드에 빗댔다. 그는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를 '코어 AI'라고 했다. 파괴적 혁신을 가져오는 연구, 원천기술을 의미한다. 인공지능 원천기술 확보가 KAIST AI 대학원의 지향점이다.

정 원장은 "그간 풀지 못했던 인공지능 난제들을 푸는 것이 피라미드의 가장 정점"이라면서 "그 정도 수준의 인력들을 양성하는 것이 AI 대학원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 모래알 협업

'AI+x' 시대를 맞아 한국 과학기술계도 그간의 연구장벽을 허무는 등 다각적인 융합 시도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에선 '모래알 협업'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아무리 뭉쳐도 모래알처럼 손 틈으로 빠져나간다는 의미다.

백옥기 연구위원은 한국의 연구 문화가 미국과 같은 선진국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외국의 경우 오픈 경쟁을 추구한다. 개인의 이득보단 함께 시너지 낼 수 있는 부분을 찾고 공동의 목표를 바라본다.

한국은 블라인드 경쟁이다. 공유하지 않는다. 연구과제도 마찬가지다. 과제가 같지 않은 이상, 옆자리 동료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도 모르는 게 다반사다.

백 연구위원은 "국내 연구원 개개인을 보면 외국보다 역량이 떨어지진 않는다. 문제는 모래알이다. 뭉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새 시대에 맞춰 여러 협업 시도가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문화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불씨 하나는 산불도 일으킨다. '나'부터 시작하면 협업 불꽃이 문화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근 구글의 인공지능 대회 '캐글(kaggle)'에서 그랜드마스터에 선정된 이유한 한국원자력연구원 박사는 '오픈' 키워드를 강조했다. 데이터를 풀어 연구 협업을 끌어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대목에선 데이터를 오픈하는 사람과 오픈된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 양측이 개방형 마인드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공유란 무엇인지. 자기만의 틀 안에 가둬놓는 것이 바람직한 연구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이타적 공유 속에서 이뤄지는 이타적·경제적 연구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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