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불모지 한국, 82년부터 핵연료 원전 설계 기술 자립
해외 거주 과학자들 국가위해 기꺼이 귀국했던 애국자
전주기 기술 개발했지만 손발 묶이며 실력 뒤쳐진 상태
세계는 원전 다시 시동, 한국 시장 경쟁력 가질까

원자력 연구개발이 다시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원전 기술 자립은 원자력 대부 한필순 소장이 1982년 3월 16일 원자력연에 부임해 오면서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기술자립 시동 40년이 된 것이지요. 오늘의 한국은 핵연료부터 원전 계통설계 기술 개발을 완료하고 건설, 운영까지 세계 최고의 원전기술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 5년에 앞으로 시장 경쟁력은 불투명하기만 합니다. 사람의 나이 40은 불혹(不惑), 판단에 흔들림이 없는 시기라고 합니다. 한국의 원자력계가 더 이상 흔들림없이 연구개발에 집중하며 소형원전, 폐기물 처리, 해체까지 원자력 분야 전주기 기술을 확보하고 기술 강국으로 다시 확고히 올라서기를 기대하면서 이번 기획(3편 보도 예정)을 시작합니다.<편집자 편지>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기술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기술 식민지가 됩니다."(한필순 소장이 1986년 원전 설계 기술 확보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는 연구진 44명에게 당부)

한필순 원자력연 소장의 목소리는 절실했다. 기술자립, 에너지 독립은 한 소장이 평생을 두고 강조한 말이다. 식민지 국가에서 어린 시절을 맞으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아픔을 직접 경험한 그였기에 자원이 없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기술자립, 에너지 독립은 꼭 해내야 할 과제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연구자들은 1986년 겨울 아침 한 소장도 미국으로 떠나는 연구진도 모두가 비장했다고 회고한다.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태평양 앞바다에 뛰어 들지언정 그냥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한 소장과 연구진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원전 설계기술을 확보하겠다고 만세 삼창으로 다짐을 공고히 했다.

원자력연이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2년 3월 한 소장이 부임해 오면서부터다. 정권이 바뀌면서 기관명에 원자력이라는 단어조차 삭제(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신뢰할 수 없다면서 미국은 폐쇄를 명령)해야 했던 연구소는 침체된 분위기였다. 연구진도 희망없는 연구소 미래에 떠날 생각만 했다. 남아있는 연구진도 연구개발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후 5시면 연구소 전체에 불이꺼졌다. 해보자는 분위기보다 안되는 이유가 더 많은 조직, 미래가 없는 연구소였다. 

그런 중에 한 소장이 대덕분소장으로 부임해 왔다. 한 소장은 원자력 전문가는 아니다.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서울대와 미국 유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연구자들은 그가 원자력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곧 가겠지, 얼마나 버티겠어"라며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소장은 직전 근무했던 ADD에서 예산을 확보해 연구환경을 개선하고 연구자를 격려했다. 외부 감사에 대해서도 연구자 편을 들며 단호하게 대처했다. 한 소장의 진심이 전해지며 침체됐던 연구소에 열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소장의 연구 열정은 ADD에서도 익히 알려진바 있다. 한국인 체형에 딱 맞는 수류탄, 낙하산을 개발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원자력 전공은 아니지만 유학 시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과학기술 분야에 식견이 높았다. 

그는 연구진들에게 상용화 가능한 연구개발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한 소장은 "연구자는 연구개발을 넘어 품질보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던 연구진들도 한 소장의 격려, 의지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연구진은 캐나다의 중수로 핵연료를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개발에 성공한다. 한국 연구진이 개발한 연료는 사용할 수 없다는 한전의 불신으로 캐나다에서 실험을 해야 했지만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 절호의 기회, 핵연료 공동설계 방식으로 

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외국에 종속되면 기술 식민국과 다름없다며 기술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의 진심어린 열정에 연구자들도 마음의 문을 열며 우리나라는 핵연료 기술자립, 한국형 원전 설계에 성공, 원전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다.
한필순 前 원자력연 소장은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외국에 종속되면 기술 식민국과 다름없다며 기술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의 진심어린 열정에 연구자들도 마음의 문을 열며 우리나라는 핵연료 기술자립, 한국형 원전 설계에 성공, 원전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다.
1983년 시기 한국의 원전은 중수로 1기와 경수로 8기가 운영중이었다. 원전도 연료도 모두 해외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중수로에 이어 실제 더 많이 사용되는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가 시급했다. 연구진은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로 경수로 핵연료 개발에 착수한다. 하지만 인력도 예산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 소장은 미국 원전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김시환 박사와 박종균 박사에게 고국으로 와달라고 요청을 넣었다. 한 소장의 간곡한 당부에 두 사람은 더 좋은 조건의 미국 근무지를 뒤로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연구자들은 국가에 대한 소명의식이 남달랐다. 

한 소장은 3일간의 긴 고민끝에 공동설계안을 제시한다. 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과 공동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인력의 절반을 외국기업에서 참여하고 국내 연구진은 일하면서 배우는 방식이다. 외국기업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제안이었다. 당시 국제적 흐름은 한국에 유리했다. 미국 스리마일섬 사고로 해외 원전 시장은 침체돼 있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원전 기술 강국들도 치열한 경쟁에 한국의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의 연구진은 미국, 프랑스, 독일 기업 중 독일의 카베유사를 선정했다. 한국의 연구진 30여명이 독일 에어랑겐으로 출발했다. 한국의 연구진은 오후 5시면 모두 퇴근하는 독일의 기술진과 달리 밤 늦도록 낮에 배운 핵연료 설계 기술을 복습하고 실제 설계를 했다. 오후 8시면 자동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상황을 몰랐던 연구진은 문을 열지못해 담장을 넘다가 경비에게 걸리는 웃지못할 사례도 여럿이다. 한국 연구진의 열정에 독일 기술진은 그들이 가진 기술을 전수해 줬다. 한국의 연구진은 해외 유학을 마친 엘리트들로 이론과 설계 경험이 더해지며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까지 마무리한다.

◆ 핵연료 이어 원전 설계기술 자립까지
 

1986년 12월 12일 원전 설계기술 자립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연구진과 한필순 소장.[사진= 대덕넷 DB]
1986년 12월 12일 원전 설계기술 자립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연구진과 한필순 소장.[사진= 대덕넷 DB]
원자력 기술의 핵심은 원자로 계통설계라 할 수 있다. 원전 자체를 설계해 한국형으로 만드는 기술개발이다. 한 소장은 핵연료에 이어 원전 계통설계 기술자립에 도전키로 한다. 84년 8월이었으니 중수로, 경수로 개발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모두들 안된다는 분위기가 컸다. 간부진 대부분도 핵연료 개발만도 벅찬데 원전 계통설계는 무리라고 반대했다. 물러날 한 소장이 아니었다. 간부진과 종일 논의 끝에 원전 계통설계도 해보기로 한다. 원자력 연료에 이어 원자력 발전 본체 설계까지 직접 한국형으로 하는 연구개발이 본격화 된다. 85년 6월 무렵이다. 

이번에도 예산, 인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다시 공동설계 방식으로 진행키로 한다. 이번에도 해외 한인 과학자의 합류가 있었다. 원전 계통 설계 책임은 맡은 김병구 박사는 미우주항공국(NASA)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 소장의 귀국 요청에 아내를 설득,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병구 박사 역시 한국의 연구자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화답한 셈이다. 김병구 박사는 훗날 자신의 책을 통해 한국 원전기술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한필순 소장을 꼽기도 했다.

1986년 12월 한국 연구진은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 설계 센터가 있는 윈저로 출발한다. 출발에 앞서 한 소장과 연구진은 기필코 기술 독립을 이루겠다는 '필(必)설계기술자립' 다짐을 다진다. 미국 연구진은 핑계를 대며 한국의 연구진에 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려 했다. 인솔 책임을 맡은 이병령 박사는 컴버스천사에 여러번 항의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 박사는 모든걸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컴버스천사에 한국연구진의 철수를 통보한다. 그제야 컴버스천 연구진이 한국 연구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국내 연구진은 HOW 넘어 WHY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한국 연구진은 3년만에 원전 계통설계 기술을 마무리한다. 한국형 1000MW 가압경수로로 96년 영광 원전 3, 4호기가 국내 기술로 완성된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로부터 초대형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전 직접 설계, 건설, 운영 모든면에서 기술력을 인정받는다. 기술불모지 한국이 원전 기술 강국이 된 데에는 이처럼 리더십과 연구진의 열정, 피땀어린 노력이 배어있다. 물론 원자력계가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국가연구소의 연구자로서 그들의 연구철학, 열정, 사명감은 분명히 인정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 전주기 원전 기술개발, 탈원전에 10년 후퇴

원자력연은 1997년 원전 전주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래 원전으로 주목돼 온 소형원전과 사용후 핵연료 재활용을 위한 파이로프로세싱과 소듐냉각소각로 개발을 시작한 것. 2012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스템 일체형 원자로 스마트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소형원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성과다. 파이로프로세싱 분야는 한미 공동연구를 통해 기술적으로 실용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스마트 원자로 고도화 연구개발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2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됐지만 책정된 예산은 35억원 규모로 턱없이 부족했다. 파이로프로세싱과 파이로 소각로(SFR) 연구개발은 미국 시험시설을 이용해 실용성과 핵비확산성을 확인 받았다. 그러나 정부 정책에는 미확정 상태로 상용화를 위한 진전이 미뤄지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한국이 원전 연구개발에 손 놓고 있는 사이 주변 여건은 크게 달라졌다. 세계 에너지시장 인사이트 자료에 의하면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신규 원전 건설을 발표하고 소형원전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시장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취임당시 탈원전 공약을 전면 폐기하며 소형원전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원전도 추가로 지어 에너지 안정을 도모키로 했다. 미국 역시 민간기업의 소형원전 프로젝트 비용 80%를 지원하며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는 모양새다. 일본도 올해말까지 12기의 원전을 재가동키로 했다. 한국의 연구진이 손발이 묶여 옴짝하지 못하는 사이 세계는 광폭 행보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월 원자력 발전 투자를 친환경적 분류로 인정 '녹색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 green taxonomy)에 포함시키는 규정안을 확정했다. 원전 전문가들은 원전 르네상스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원자력계 한 인사는 "한국이 스마트 원자로를 가장먼저 개발했지만 탈원전 정책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뉴스케일 등 미국 기업이 세계 시장을 치고 나가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고유기술도 있지만 SMR 기술도 상당하다"면서 "러시아는 건설 후 운영으로 수익을 창출하겠다, 사용후 핵연료를 자국에 보관하겠다는 전략으로 빠르게 시장을 확장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원전 건설 최고 인프라를 갖췄지만 그동안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미국과 협력 관계도 소원해졌다. SMR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지, 세계 시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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