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기 KAIST 명예교수,  수요자·현장 중심 강조
"공학자는 국경이 있다, 자국만의 문제 해결해야"
"과학·공학·기술 협력할 때 세상 변화되는 기술 탄생"
"한국 공학 교육 현재 선진국만 보고 있다, 미래는?"

반도체 대부 김충기 KAIST 명예교수는 한국이 독립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공학자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다.[사진= 길애경 기자]
반도체 대부 김충기 KAIST 명예교수는 한국이 독립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공학자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다.[사진= 길애경 기자]
"공학자는 국경이 있다. 자기 나라만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의 마음, 머슴 정신으로 무장하고 엘리트 정신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공학자의 마음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를 지켜갈 때 독립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성장을 이끈 반도체 대부의 고언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늘날 한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배어났다. 그는 우리나라가 후진국, 개발도상국, 선진국을 넘어 독립선진국으로 올라서길 기대했다. 이를 위해 국가, 사회, 국민 모두가 검소함을 유지하며 스스로의 품위(dignity), 타인(타국)에 대한 존경(respect)의 마음을 갖춰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충기 KAIST 명예교수는 국내 반도체 산업 성장의 대부로 평가된다. 그는 1975년 미국 최고 반도체 기업을 뒤로하고 KAIST를 선택한다. 학교에 부임해 그는 가장 먼저 연구실에 반도체 공정 전체를 실습할 수 있는 장비, 설비를 갖추는 일부터 했다(다행히 학교, 선배들도 그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년에 걸쳐 반도체 집적회로 제작 설비를 설치했다. 이론과 실습으로 현장의 요구, 현장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공학자의 마음을 갖춘 인재 양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우수 인재들이 그의 연구실로 모였다. 그는 1975년부터 2010년까지 72명의 석사와 38명의 박사를 지도했다. 국내 대학원생 논문이 해외 유명 학술지에 우수 논문으로 게재됐다. 또 배출된 인재들은 국내 반도체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그들은 80, 90년 한국이 빠르게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연구실에서는 새로운 미래 도전에 나섰다. 박막 트랜지스터, 액정 디스플레이 등 새로운 주제에 도전했다. 오늘날 한국 기업이 디스플레이에서도 강국이 된 비결이 됐다. 김 교수는 공로를 인정받아 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다. 그가 반도체 대부로 불리는 이유다.

김충기 KAIST 명예교수는 "우리의 교육은 현재의 선진국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교육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예습"이라면서 "미래는 우리의 과거에서 나온다. 선진국만 베끼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위기에 처한 것도 그 때문이다"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예산, 규제만으로 반도체 산업이 성장할 수 없다. 그에 앞서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과거를 보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교육이 이뤄지고 공학자의 마음가짐이 돼 있을 때 투자해야 성공한다. 예산만 투입해 외국 기술을 베끼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반도체 용어에 대해서도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다. 반도체라는 단어는 재료의 이름(자동차에 비교하면 쇠 부분)으로 이 부분은 재료 분야에서 다룬다. 보통 반도체 연구는 반도체를 재료로 하고 트랜지스터를 기본 소자로 직접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

◆ 어린 시절 부친의 일터가 놀이터

김충기 교수는 선친의 이야기로 공학자의 마음을 설명했다. 그의 부친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마치고 경성방직에서 일했다. 부친은 공장장으로 가족과 같이 사택에 살았다. 자연스럽게 공장은 그의 놀이터가 됐다. 쇠를 깎아 구슬치기를 하고 기계 공작실도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날 공장안의 기계보다 출입문이 작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기계가 들어왔지?" 하고 의문이 들었다.

"부친께서 기계를 먼저 놓고 담을 올리고 집을 지었다고 이야기 하시더라. 어린 나이였지만 뒤집어 생각하는 습관, 뒤집어 생각하는 법의 교육이 됐다. 또 회계 장부를 잠시 보는 것만으로 잘못을 찾아 내시길래 물었더니 오른쪽 1원 단위와 가장 앞에 큰 단위를 합산해 본다고 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였다."

"해방 후에는 기계가 파괴돼 공장 가동이 멈췄다. 일본은 한국에 기계설계는 알려주지 않았다. 부친께서 비슷한 기계들의 부품을 빼서 가동되도록 하셨다. 6.25 시기에는 그 기계들로 광목을 만들어 내셨다. 돌아보면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 교수의 진로는 자연스럽게 공대였다.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수업 중 들은 물리 수업이 재미있었다. 미국 유학 후 대학원은 물리를 선택했다. 진로는 반도체 분야였다. 1947년 이미 트랜지스터가 개발돼 당시 미국에는 최고의 반도체 기업들이 있었다. 그는 1970년 미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페어차일드 연구소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반도체 핵심 소자인 전하결합소자(CCD)가 처음 개발된 직후였는데 회사에 가니 학교와 많이 달랐다. 자체 교육을 몇 달 간 받았다"라면서 "회사의 CCD 연구에 참여하게 됐다. 기초연구와 CCD영상감지 소자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그런데 옆에 인텔에 같이 공부한 연구자가 갔는데 그들이 CCD를 우리보다 먼저 하고도 새로운 기술이 나오기까지 발전시키고 무르익은 후에 내놓더라. 기초부터 실용화까지 충분히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라면서 "그 작전이 대만 반도체 기업 TSMC에 적용됐다. TSMC가 오늘날 수요자 중심, 수요자에 딱 맞는 제조공정으로 성공했다. 공급자 중심의 대량생산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수요자 중심의 서비스가 성공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TSMC는 그 마음을 장착하는 데 공을 들였고 고객을 섬긴 것"이라면서 "우리나라도 그런 마음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바텀업으로 갈 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 과학·공학·기술의 협력

김충기 교수는 75년 고국행에 오른다. 국내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싶다는 마음과 부친의 빈자리를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모친의 서울 아파트에서 두  달 정도 머물게 됐단다.

그는 "새로 지은 아파트인데 전등, 수도 등에서 결함이 발견됐다. 당시로는 최고급 아파트라고 했는데 불편한 게 많더라. 양변기는 미국것을 그대로 들여왔고 화장실은 한국형에 따라 기울기가 있었다"면서 "기술도 마찬가지다. 대량생산으로 바로 들어가면 안 된다. 우리에게 맞게 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맞을지를 찾는 게 공학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게 공학자의 마음"이라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KAIST에 와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했다. 여러 사례들을 들면서 공학자의 마음은 큰 것 뿐만 아니라 작은 부분도 신경을 쓰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면서 "제자들이 공학자의 마음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앞을 보면서 지속적 투자와 연구가 이뤄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공학·기술은 역할이 다르지만 협력할 때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증기 기관차를 예로 들었다. 증기 기관차는 열을 내 기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연료 낭비 등으로 활용이 안됐다. 이후 1765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의 힘으로 피스톤 회전운동을 하는 증기기관을 고안했다. 피스톤이 가장 잘 맞도록 만든 것은 와트 이웃에 살던 부품제작자였다.

김 교수는 "기관차가 움직이기까지 기존 이론에 공학자가 아이디어를 더해 문제를 해결하고 테크니션이 피스톤 등 부품을 깎아 맞추면서 실제 작동하는 증기기관차가 탄생했다"면서 "과학자가 이론을 제시하면 공학자는 어떻게 작동할지를 연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효율성을 제시한다. 테크니션은 거기에 들어가는 부품이 최적 상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과학, 공학, 기술이 다 있어야 하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협력이 안 되는 구조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교수는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면서 공급자 중심의 대량생산으로 산업이 발전했고 사람도 거기에 맞춰 육성됐다. 그러면서 지금은 앞으로 내다볼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사회 전체에서 정보화 사회를 서두르고 있는데 공급자 중심으로 가면 안 된다. 제대로 된 서비스 사회가 된 다음 정보화 사회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가 본 한국은 정부, 연구자, 교수, 의료진도 공급자 중심이다. 그는 "학교, 기관 조직에 와서 일할 때는 그 조직의 목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독립선진국의 책임 있는 시민사회가 되려면 학교에서도 그런 부분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면서 "자존감과 존경을 같이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립선진국이 될 수 있다. 자국(개인)은 디그니티가 있어야 하고 다른 나라(다른 사람)를 리스펙트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돈과 법으로는 안된다. 공학자의 마음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 김충기 KAIST 명예교수는
1942년생으로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 전기공학과에서 석, 박사를 마쳤다. 70~75년 미국 반도체 기업 페어차일드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75년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 후학 양성에 집중했다. 95~97년 KAIST 부총장을 지내고 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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