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장 공모시즌마다 유행처럼 번져
연구현장 "투서가 과학현장 죽인다" 자기진단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에는 불행히도 남부끄러운 표현이 따라다닌다. 정책 당국은 물론이요 사회 각계로부터 '투서 천국'이라는 뼈아픈 논평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학계 종사자들이 힘을 합쳐 과학계 전체의 투명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 불이익을 준 기관장과 주요 보직자들에 대한 투서로 '단판 승부'를 짓는 기괴함이 연구 현장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장에서는 투서야말로 과학계를 죽이는 '원흉'이라고 자가 진단한다. 외부인 시각으로 보더라도 연구현장은 '파도 위에 흔들리는 종이배'로 비유될 정도로 흔들림이 심하다. 하지만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외부 영향에 앞서 내부 문제가 더 크다는 다소 의외의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우리 과학계가 연구 성과의 효율성과 수월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이지만 자기 연구영역 침범에 대한 방어나 불이익에서 벗어나는 데 더 큰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어 과학계 전체의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과학계는 깊은 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서로 연구기관 전체가 흔들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그 시스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각종 음해성 투서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 또한 과학계 내부의 고질적 현실이다.

부작용은 투서 작성자와 대상자의 피해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음해성 투서로 인해 성실하게 연구 중인 대다수 연구원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주는 게 일반적인 양상이다. 감사원이나 정부의 특별감사가 뜨면 연구원이나 조직 전체의 과학자 그룹이 무슨 범죄 그룹인양 취급받는다.

기관 내부에서는 내부대로 누가 투서했는지에 대한 의심과 오해가 만연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형국이다. 고통스런 경험 끝에 연구현장 구성원들은 '더이상 투서로 제살깎기하지 말고 문제를 대화로 풀어나가자'고 외쳐보지만, 매번 그 때뿐이다. 언제 또 투서가 파란을 불러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 지금도 상당수 출연연 음해성 투서·제보로 '몸살'

출연연 기관장 공모철만 앞두면 기관장을 비롯한 특정인을 겨냥해 '마녀사냥식' 투서와 매터도(흑색선전)가 난무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도 일부 출연연 기관장 공모 과정에서 투서가 들불처럼 번졌다.

투서로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기계연구원이다. 국무총리실 특별감사를 받은 기계연의 경우 상당수 과학자들이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현장 증언에 따르면 혐의도 없는 연구자들이 조사받을 때 그 곤혹스러움이 이루말할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왜 일반 피의자들이 검찰조사 도중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털어놓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지식경제부로부터 8월 말까지 강도 높은 징계가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좌불안석이다.

이미 기관장과 선임연구본부장은 중도 사퇴했다. 기관장이 공격받는 경우 기관장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연구원 조직 전체가 모래알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관 운영의 구심점이 없어지고, 서로를 의심으로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기관을 순식간에 모래알 조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K연구원도 음해성 투서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내부 은퇴자의 가명으로 쓰여진 투서가 정부부처, 언론사 등 곳곳에 전달된 것이 발단이었다. 투서의 타깃은 기관장과 주요 보직자다. 시간과 장소 등 육하원칙에따라 구체적으로 적은 형식의 투서에는 술자리 향응 접대 등이 담겨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해당 보직자는 내부 조직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처를 받고 보직을 그만둬야 했다. 이 연구원은 최근 또 하나의 내부자 투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방에 있는 시설 관련 주민보상 활동비 문제를 둘러싸고 경찰이 수사 중이다.

9월 중 기관장 선임을 앞두고 있는 모 연구원에도 기관장 공모 과정에서의 투서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는 국무조정실의 조사가 최근 행해졌다. 역시 현 원장을 상대로 한 투서 내용이었으나, 국조실에서는 특별한 혐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최근 기관장 연임에 성공한 모 연구원 역시 올초부터 투서로 고초를 겪었다. 일부 언론에 투서 내용이 그대로 보도돼 마치 루머들이 사실인양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각종 루머들이 음해성 내용들인 것으로 판명돼 한숨을 덜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가슴앓이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지난 4월 기관장 공모에서 3배수에 오른 한 후보자는 자신에 대한 매터도 확산으로 곤욕을 치렀다고 고백한다. 그에 따르면 기관장으로 부적합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별의별 내용들이 다 돌아다녔단다. 개인적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유착 관계도 등장했다.

이 후보자는 "좋은 기관장감이 소위 투서 때문에 '더러운 꼴'을 당하기 싫어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투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L 출연연 기관장은 "투서가 이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줄 알았더라면 인사문제나 기관경영 문제를 그렇게 원칙대로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 투서, 왜 발생하나?…기관장 공모제 문제 등 복합적 이유

투서의 진원지는 기관장 등 이해당사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관장이 인사권과 기관 예산 등 경영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당했다고 여기는 이해당사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피해를 보지 않았다면 특별히 투서를 할 이유가 없다.

현재와 같이 3년마다 기관장이 바뀌고, 또 기관장이 경영 전권을 가지고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피해를 봤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올 수 밖에 없고, 결국 이런 관례가 투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내부자가 기관장이 된 경우는 내부의 친한 세력 중심으로 인사를 하는 경향이 있고 이때마다 소외된 그룹에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외부자의 경우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인사를 하다보니 자연 파벌이 생기게 된다. 출연연 기관장이 정부부처 입김으로 별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기관 내부 살림의 경우 사실상 기관장에 권한이 집중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개 기관장 공모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투서나 흑색선전은 없어진다.

하지만 새로운 기관장이 업무 파악을 하면서 가장 먼저 인사를 단행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불만 세력이 생긴다. 연구예산 배정 문제도 갈등을 유발시키는 주요 변수다. 돈을 둘러싼 이해관계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양상이다. 기관장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할 경우 잘못된 것을 잡아줄 견제세력이 거의 없는 것도 문제를 키운다.

내부 감사 기능이나 노조 활동도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약해진터라 기관장의 경영 집행과정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연구현장은 기관 경영에 불만이 쌓이는 사람들이 생기고 기관장 공모 시즌에 맞춰 투서나 흑색선전으로 그동안 쌓인 감정을 풀어놓는 사례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투서자 보호다.

철저히 보호받다 보니 아무런 걱정없이 투서를 남발한다는 비판이 많다. '한 번 찔러보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투서하는 사람은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 반면 이해당사자와 조직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다고 한다. 만약 투서내용이 20가지라면 그중 한가지만 걸려도 투서자의 목표는 달성된다.

이런 현행법상의 문제도 현장에서는 안타까워하는 점이다. 구조적으로는 출연연의 계속되는 구조조정 논란과 흔들림 현상이 조직에 대한 애정을 떨어뜨려 조직원들이 투서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취하게 만든다는 해석도 있다. 조직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연구소에 마음의 뿌리를 못내리는 것이 투서의 또다른 배경이라고 지적하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과학기술계 특유의 특성이 투서 문화를 부추긴다고 평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강한 자존감을 느끼는 그룹이라서 자기 논리에 맞지 않으면 투서와 같은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과학기술계 한 원로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상적이지 않은 고발문화가 만연하는 것은 과학자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며 "지금 과학계는 소통과 조직 상생 혁신을 위한 시스템 변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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