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수 대학 출신들, 줄줄이 허탈과 실망···우수인재 확보에 악영향
"과제 책임 박사 SNS로 해고통보하고 주말, 야근업무 지시도"

#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A 박사. 고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국의 직장을 접고 전공과 맞는 정부출연기관 위촉연구원 공모에 서류를 내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도 안돼 후회하고 있다. 주말, 퇴근 후에도 시도때도 없이 호출하며 '와라가라'하는 정규직 책임 박사의 지시에 자괴감이 들 정도다. 국내 연구환경에 실망한 그는 결국 영국으로 떠났다.

# 국내 대학에서 석사 학위 후 정부출연기관 위촉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한 B. 최근 퇴사를 고민 중이다. 과제 책임 박사의 발표 자료도 대신 작성할 정도로 과제 진행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는 학회 참석도 못했다. 위촉연구원은 내부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기관 문화에 학회 참석 기회조차 부여 받지 못한다.

위촉연구원. 과제 단위로 선발하는 인력으로 길면 3년, 짧게는 몇개월간 과제에 참여한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구분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본격 논의하고 있지만 위촉연구원이 혜택을 받을지는 미지수라는게 지배적이다. 행정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제가 끝나고 더이상 계약이 연장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현장 위촉연구원들의 절규는 정규직 전환에 앞서 자신을 둘러싼 현재의 연구환경이다. 똑같이 학위받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도 위촉연구원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인정받기 보다는 수직적 관계가 지속된다. 연구 동료로 인정하기 보다는 과제에 필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높다는 것이다.

◆ 계약 기간도 들쑥날쑥 SNS 해고 통보 일상

"11개월 일했는데 한달 쉬고 계약을 하자고 제안해 알았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술책이었다. 그나마도 싫다고 할 수 없었다. 항의하면 일방적으로 SNS로 해고통보를 하기도 한다. 울며 겨자먹기다."

"과제 책임자에 따라 주말에도 업무 지시를 내리면 거절할 수 없다. 야근, 주말 근무에도 위촉연구원은 아무런 수당이 없다. 같이 연구하는 동료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출연연에서 3년째 위촉연구원으로 일하는 C연구원. 그 역시 초기에는 시간제를 제안하는 박사의 지시에 그대로 따라야 했다. 계약서상 39시간 시간제로 할 경우 주택 지원을 해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외부 지역에 근무할 경우 전일제만 주택지원이 되는 제도를 악용한 사례다.

한 달 쉬고 계약하자는 일은 빈번하다. 12개월 이상 일하면 기관에서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11개월만에 계약을 만료하고 다시 계약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D연구자는 해외 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국내에서 일하고 싶어 위촉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과제에 참여하면서 과제에 대한 애정으로 과제 책임 박사의 말을 따르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하루에도 수십번 그만 둔다는 생각을 한단다.

행사 동원과 주말, 야근 동원은 수시로 발생한다. 과제 책임 박사의 일정에 따라 SNS로 주말과 퇴근 후에도 업무지시가 내려오면 따라야 한다. 

C 연구원은 "주말에 친구 결혼식 등이 있어 예약을 해둬도 업무지시가 내려오면 못한다고 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주말근무 수당을 따로 주는 것도 아니다"면서 "바쁠때 가사도우미 부르듯 와라가라 한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 육아 휴직은 남 이야기, 행사에 동원되지만 구성원에서 배제

정부 정책에 따라 아빠가 육아 휴직을 신청하는 사례도 늘고 있지만 위촉연구원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과제별, 기간별 계약으로 일을 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그만둬야 하는 계약조건 때문이다.

E연구원은 위촉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년전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위촉연구원은 육아휴직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일피일 아기 갖기를 미루며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지만 과제가 진행 중이라 쉽게 그만 둘수도 없다. 연구분야 폭이 넓지 않아 입소문이 나면 다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다. 

C연구원은 아예 결혼을 미루고 있다. 30대 중반인 C는 집안에서 결혼을 재촉하고 있지만 현재 근무조건에서는 결혼=퇴직이라는 생각에 아예 결혼 생각을 접었다.

행사에 동원돼 자리를 채우는 것도 위촉연구원의 몫이다. D 박사에 의하면 기관 행사에 자리를 채우기 위해 관련 팀의 위촉연구원들이 모두 동원됐다. 행사에 참여하는 동안 하지 못한 일은 자발적인 야근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행사 마무리 후 행운권 추첨 등이 진행되면 이 자리에서도 위촉연구원은 외부인으로 취급된다. D 박사는 "어쩌다보니 아니 인원이 많다보니 위촉연구원이 연달아 행운권에 당첨되자 기관장부터 주변에서 '외부인만 된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더라"면서 "하지만 전직원이 참석하는 시무식 등 공식행사에서는 위촉연구원은 배제된다. 구성원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 논문에 이름을 넣느냐고요? 당연히 없어

위촉연구원은 연구의 밑바탕이 되는 자료조사부터 실험까지 다양하게 참여한다. 과제 책임연구자의 지도가 있지만 연구성과가 나고 논문이 작성되는 과정에서 위촉연구원이 실질적인 역할을 상당수 도맡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위촉연구원의 이름은 논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A 박사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제 책임 박사에게 항의도 못했다. 관행처럼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이에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당연했던 것 같다. 항의하면 당장 해고 통보를 하니 말 잘듣는 위촉연구원만 남는 구조"라면서 "처음에 위촉연구원이 이런 자리인줄 알았다면 국내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스럽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는 결국 국내 출연연을 포기하고 공부했던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례는 A뿐만 아니라 해외 우수인력이 국내 연구기관을 찾았다가 다시 돌아가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해외 우수인력 유치 후 안착을 위한 국내 환경 마련도 시급해 보인다.

위촉연구원이 연구분야 학회를 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다. 해외 출장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과제가 아니고는 위촉연구원에게 해외 출장 기회를 제공하는 과제 책임자는 없단다. 또 위촉연구원으로 근무 중에는 내부 행정직 등 공모에도 제대로 참여할 수 없다. 기관별로 다르지만 내부 근무 경력자가 다른 직종에 서류를 낼 경우 제한을 두는 제도가 있어서다.

다수의 위촉연구원은 "위촉연구원으로 오는 경우는 모집 공고를 보고 오기도 하지만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가는 일도 많다. 그러다보니 책임 박사의 횡포에도 아무소리를 못하게 된다. 지도교수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면서 "그동안 이런 실상이 알려지지 않으면서 많은 석박사 졸업생들이 위촉연구원으로 오지만 큰 실망을 하고 가게된다. 이제라도 제대로 알려 변화를 촉구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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