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제일 먼저 인사하는 남쪽으로 떠난 유유자적 여행
글 ·그림 ·사진 : 강선희 anger15@nate.com

유난히 날씨가 좋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버스터미널에는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전주 등 가까운 관광지로 향하는 버스는 오후 1시께까지 벌써 매진인 듯 보였다.
 

대전에서 남해로 가는 직행버스는 하루 세 번 있는데 인터넷 예매가 되지 않아 그냥 왔더니 아뿔싸, 매진이다. 결국 한 시간을 더 기다려,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해서 남해로 가야 했다. 정말 먼 길이다.

그래도 '가급적 멀리' 떠나고 싶어 지도를 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선택한 여행지인데 이렇게라도 행선지로 향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싶다. 게다가 이런 고된 여정을 따라오고 싶어하는 동행인도 있으니 다행히 심심치 않다.
 
버스가 남쪽에 다다르자 산에 핀 짙은 분홍빛 진달래꽃들이 눈에 띄었다. 길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남쪽은 완연한 봄이다.


 

 

남해가는길
남해가는길

저 멀리 옥빛 남해바다의 수평선이 반짝였다. 얼마만에 보는 바다인가? 마음만 먹으면 이리 멀리도 떠나올 수 있는데, 왜인지 평소에는 그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내가 바쁜 것인가, 내 마음이 바쁜 것인가.

집에서 오전 9시도 전에 나왔는데 어이쿠, 남해터미널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3시였다.
 

"남해는 차가 있어야 여행하기 편한데, 뚜벅이면 너무 빠듯한 일정은 잡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쉬어가자고 오는 여행인데 고되게 돌아다니면 그건 여행이 아니지요."
 

터미널로 픽업 나온 숙소 사장님의 일침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에 계속해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졌다. 다 가질 수 없다.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 그래서 그 첫 번째는 낚시였다.

남해의 대표관광지인 보리암과 다랭이마을 등을 다 제치고 내가 여기까지 내려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 방파제낚시. 돌더미 위에 서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나를 상상했다. 세상 여유로우면서도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게 낚시 말고 또 뭐가 있으랴!

 

독일마을 맞은편에 있는 물건항.독일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는 밤낚시도 운치있다고 한다
독일마을 맞은편에 있는 물건항.독일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는 밤낚시도 운치있다고 한다
우리는 숙소에서 머지않은 물건항으로 향했다. 사장님이 오늘 만조가 일러서 물이 차기 전에 쌈박하게 낚시를 하고 방파제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했다. (사실 이 게스트하우스를 고른 이유는, 낚시대를 무료로 대여해 주는데다, 낚시동행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낚시 초보에게는 꿀옵션이 아닐 수 없다.)

물때를 잘 탔는지 입질이 좋아 미끼를 끼어 던지자마자 망상어 한 놈이 잡혔다. 20cm는 족히 돼 보였다. 혹자는 '낚시가 무슨 재미냐' 하겠지만 어릴 적 아빠를 따라 낚시터를 곧잘 따라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낚시란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라 했다. 한 눈을 팔면 물고기가 미끼를 데어먹고 도망가버리니 찌가 움직이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사장님은 낚시란 정성이라고 했다. 입질을 한 미끼는 떼어내고 다시 새 놈으로 끼어 던져야 물고기가 또 온다고 했다. 허투루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낚시란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다.

두 시간에 무려 일곱 마리나!
두 시간에 무려 일곱 마리나!

두 시간 남짓, 꽤 잡았다. 그래도 손맛을 보러 온 것이었으니, 다 놓아주고 기념으로 제일 처음에 잡은 한 놈만 가지고 왔다. 너는 오늘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렴. 배가 고팠던 우리는 땅꺼미가 지자마자 철수를 하고 숙소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은점마을 방파제로 다시 밤낚시를 나갔다. 이번엔 루어낚시다. 너무 오래 전에 던져봐서 미끼가 자꾸 코 앞에 떨어지길래 답답해 했더니 사장님이 '낚시대가 12시를 지날 때 손가락을 떼어라'고 팁을 주었다. 그제야 감각을 찾았다.
 

그런데 이 날 하필 보름달이 떠서 야행성인 볼락을 잡기는 어려울 거란다. 이렇게 환한 밤에는 물고기가 숨는다고. 휘영청 밝은 달에 밤바다는 운치 있지만 나의 손은 무의미한 줄감기를 되풀이하는구려… 하는 순간 타다닥! 엄청난 손맛이다. 재빠르게 살짝 당겨 지그시 감아 올리니 마침내 손바닥만한 볼락 한 마리가 같이 올라왔다. 같이 낚시를 나갔던 옆방 사람들까지 와서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정말 강태공이라도 된 양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오늘 남해까지 내려와서 원 없이 낚시했네. 진짜 재밌었다."
"언니… 저 사실 버스를 오래 탄 게 좀 피곤해서 저녁엔 숙소에서 쉴까 했는데, 낚시를 하는 언니가 웃고 있진 않아도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같이 나왔어요. 근데 나오길 잘했네요, 볼락도 잡고!"
 

그게 그렇게 티가 나다니!

그날 밤 우리는 옆방 여행자들과 함께 술 한 잔을 거나하게 했다. 우리가 잡은 물고기로 버터구이도 하고 사장님이 아껴둔 군소도 꺼내주셔서 맛도 봤다. 알고 보니 동갑내기였던 옆방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져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던 것 같다.

 

카페유자. 남해에서 난 유자로 만든 담백한 카스테라가 일품이다
카페유자. 남해에서 난 유자로 만든 담백한 카스테라가 일품이다
다음 날.

"뭐~어? 농어촌 버스를 타고 다랭이마을에 갔다가 남해터미널에서 진주, 진주에서 또 대전? 너네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
 

나도 안다. 예상대로라면 자정께 집에 도착해 파김치가 될 거고 험난한 월요일을 맞이할 것이다. 이걸 알고도 따라온 나의 동행인에게는 경의를 표할 정도다.
 

"야! 그 버스표 버리고 우리랑 같이 가자. 우리가 더 좋은 거 보여줄게. 그리고 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니까 대전까지 데려다 줄게."
 

귀를 의심했다. 동행인과 나는 흔들렸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또 다른 서울 친구가 결정을 도와줬다. '낄끼빠빠 몰라? 이럴 때 끼는거라구.'

마지막으로 커피나 마시고 헤어지자고 들른 카페유자에서 똘똘 뭉치게 되다니!
그래서 덕분에 갈 수 있었다. 봄꽃을 보러!
 

유채꽃축제를 한 주 앞두고 있었던 두모마을은 이미 유채꽃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식으로 출렁이는 노오란 물결을 보니 눈이 절로 즐거웠다. 사진을 수도 없이 찍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온 서울 친구들은 남해에서만 주행거리가 130km 가까이 된다고 했는데 '무언가 보여주겠다며' 또 다시 남해를 빙빙 돌아 우리를 꽃밭으로 데려간 거다.

 

두모 유채꽃 메밀꽃 단지에 만발한 유채꽃
두모 유채꽃 메밀꽃 단지에 만발한 유채꽃
게다가 농어촌 버스를 타고 진땀을 빼고 있을 우리가 이렇게 남해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저 멀리 이름 모를 섬이 해무에 둘러싸여 묘한 경치를 만들어냈다.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행복하다고 몇 번을 읊조렸는지 모르겠다.

어제 만난 사이인데, 우리들의 공기에는 마치 오래 알았던 것 같은 익숙함이 있었다. 옛날 노래를 들어가며 합창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확실히 더욱 치열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더욱 단련되어 있다고 할까? 그 단단한 맷집이 그들의 표정에서, 어투에서, 이야기에서 느껴졌다.

남해 5인방. "어제 만난 사이 맞습니다"
남해 5인방. "어제 만난 사이 맞습니다"

남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충렬사였다. 사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지역명소나 '꼭 들러야 할' 관광지를 알아볼수록 간 김에 들르고자 하는 욕심만 늘어날 것 같아 사전 조사도 허투루 했던 터였다.

벚꽃이 활짝 핀 충렬사에 올라 좋은 기를 받아가자고 다들 손을 모았다. 저 멀리 빨간 남해대교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곧 저 다리 위를 지날 때면 이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구나, 생각했다. 짧지만 생각지도 못한 시나리오로 풀어낸 꽉 찬 여행이었다. 뒤따라오던 서울 친구가 말했다.
 

"이젠 집에 가고 싶다! 정말 잘 놀았어. 당분간은 엉덩이 들썩이지 않고 일 할 수 있겠어."
 

남해 충렬사에서의 마지막 산책, 남해대교를 바라보며 고즈넉한 매력
남해 충렬사에서의 마지막 산책, 남해대교를 바라보며 고즈넉한 매력

남해대교 전경
남해대교 전경
오후 늦게 비소식이 있을 예정이라더니 공기가 차가워졌다. 우리가 탄 차가 남해대교를 빠르게 빠져나갈 때, 서울 친구에게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니 틀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좋아하는 노래인가 봐?"
"응. 이 노래에 지금을 입히고 싶어서. 참 좋은 여행이었어."
 

그럼 언제든 기억나겠지, 이 노랠 들을 때마다.
빨간 남해대교와 만개한 봄꽃들, 너희들, 그리고 더없이 행복했던 내가.
잔잔한 바다가 조용히 인사를 던지는 듯 했다.  

남집 게스트하우스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 960번길 14-13
                                     도미토리 1인 25,000원
                                     밤낚시 동행서비스 10,000원
                                     낚시대 대여 무료, 미끼준비 3,000원

두모 유채꽃 메밀꽃 단지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134-1

카페 유자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 1423
                    수요일 휴무, 영업시간 11:00~18:00
                    유자 카스텔라 1접시 4,000원/드립커피 4,000원/우유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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