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일본 사쿠라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해 올해 일본 반도체 수입시장에서 대만산 반도체가 한국산을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10월 현재 대만산 반도체는 일본에 2천6백15억엔 어치 수입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3.7% 늘었고, 이 기간에 한국산은 2천3백52억엔(45.1% 증가)어치가 수입됐다는 것.

사쿠라연구소의 다케우치 준코 연구원은 “한국은 D램이 강해 이 품목 수입량은 늘겠지만 대만산은 비메모리·플레시 메모리 등 다양한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어 결국 대만산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로 뻗는 대만 반도체산업=세계 최고 칩메이커로 꼽히는 인텔사는 지난 4일 인텔 응용디자인센터(ADC)아시아태평양본부를 대만에 세웠다. 이 센터는 인텔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고객(반도체 회사)에게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고 지원하기 위한 곳으로 반도체 관련 기업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대만에 본부를 설치했다. 일본 히타치사는 지난해 처음으로 대만 UMC사 등에 반도체의 외주 제작을 시작했다. 히타치는 설비투자의 부담을 줄이고 설계 등 기본기술 연구 투자를 더 늘려 칩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에는 외주 제작 비중을 20% 이상으로 더 늘릴 계획이다. 일본 업체의 수요가 늘어나자 대만 업체들은 아예 일본에 회사를 설립하고 있다.
대만 UMC사는 최근 일본에 니폰파운드리를 세우고 일본 업체의 주문을 받아 생산 중이다. 샤프사는 이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납품 받기 위해 지분 2.8%를 사들였다.
경북대 함성호 교수(전자전기공학부)는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에서 비메모리 중심으로 기술이 진화하는 단계”라며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 뛰어나고 소량 주문도 소화할 수 있는 수탁생산(파운드리)위주의 대만식 산업구조가 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세계 주요 칩 메이커들이 칩 하나에 시스템을 구동하는 핵심 기능을 모은 시스템온칩(SOC)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연구개발비가 많이 드는 반도체 개발에 주력하면서 제조를 위한 설비투자보다는 외주를 주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구조도 변하고 있다.
1980년대는 칩 설계부터 제조·검사까지 한 기업에서 하는 일관공정 업체가 주도했다. 90년대 이런 일관공정 업체와 함께 칩설계 전문 업체가 파운드리 공장에 주문해 생산하는 등 분업화된 산업구조가 자리잡았다. 전문가들은 21세기 반도체 산업은 분업화 구조가 더욱 뚜렷이 자리잡을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일관공정 업체들도 다양한 칩을 제조하기 위해 설계한 칩을 파운드리 공장에 주문해 제작하는 수요가 늘어나 파운드리 업체의 수익이 좋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공격적인 대만 반도체 산업=대만 반도체 산업의 올해 총매출액은 1백83억달러로 한국 반도체의 매출액 전망치(2백85억달러)의 64% 선이다. 그러나 올해 세계 반도체 업체 가운데 대만의 TSMC는 47억달러를 투자해 인텔사(66억달러)에 이어 2위, UMC는 29억달러로 3위를 차지했다.
대만공업기술연구원(ITRI)은 98년부터 올해까지 2백억달러의 투자가 이뤄진 것으로 추산했다. 이밖에도 주요 10개 업체가 2003년까지 새로 짓겠다는 제조공장이 16개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반도체가 쓰이는 모니터 ·스캐너 등 주변 첨단 산업이 발달해 내수시장 규모가 크고, 내수용 반도체 대부분을 국내에서 조달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대만산 반도체의 62.3%가 국내 산업용으로 쓰였고, 국내에서 필요한 메모리 ·비메모리 반도체의 90% 이상을 자체 조달하고 있다. 96년 세계 반도체 시장이 불황을 겪었을 때에도 대만은 꾸준히 성장하는 등 세계 경기에 덜 민감하다. 대만은 이밖에도 한국의 외환위기 와중에서 현대전자·삼성전자 등에서 퇴직한 기술인력들을 끌어들였다. 국내 업계는 대기업 출신 연구인력 중 50여명이 대만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진로=대만의 파운드리 업체 TSMC의 량멍쑹(梁盟松)수석임원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해 “너무 큰 것은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TSMC는 기술을 쫓아간 것이 아니라 대기업 ·중소기업 고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시장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을 갖게 되었다”며 “대기업은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는 요구를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자기 방식으로 밀고가다 보면 시장의 소리에 더욱 둔감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대만보다 세계 반도체 경기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불황기에는 더욱 큰 폭으로 경기가 하강하고 호황기에는 큰 폭으로 상승하는 등 기복이 심하다. 경기에 민감한 메모리 중심인데다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90%를 수입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또 대만의 대학은 현장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을 훈련해서 내보내는 반면 한국 대학 졸업자는 실무 능력과 거리가 멀다. 산업자원부가 비메모리 반도체설계업을 육성하기 위해 3백60억원을 지원한다는 보도를 보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한다는 이종씨는 중앙일보에 “이 돈은 30∼40명의 엔지니어가 있는 중소기업을 2∼3년 지원하면 바닥날 것”이라며 “진정 비메모리를 육성하겠다는 의지라면 1조원 정도의 지원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e-메일을 보내왔다.
한양대 배종석 교수(경영학과)는 “삼성전자야 사상 최대의 수익을 내고 있지만, 세계 D램업계 1위인 현대전자가 유동성이 부족해 힘들어하고 중소업체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투자 재원을 제대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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