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최형섭 2대 과기처 장관 서거 21주년
대덕넷, 29일 11시 대전현충원 묘역 참배 예정
과학계 "위기의 대한민국 초심으로 돌아가자"
지난달 서거 21주년 토론회 이어 독서 확산
실용 과학 정책과 연구자 덕목, 정신 재조명

1966년 KIST 초대소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는 최형섭 박사(사진 오른쪽).[사진= 대덕넷DB]
1966년 KIST 초대소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는 최형섭 박사(사진 오른쪽).[사진= 대덕넷DB]
과학기술계에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독서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정책, 철학의 토대를 다진 故 최형섭 2대 과학기술처 장관(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의 회고록이다. 29일은 최형섭 초대 장관의 서거의 21주년이기도 하다.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공학자, 행정관료, 정치인, 대학교수이기도 하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금속공학 분야 박사 학위 후 귀국을 선택한 그는 해방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 꼴찌 국가 대한민국이 오늘날 과학기술 강국, 산업강국에 오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특히 故박정희 대통령, 故오원철 수석과 함께 대덕연구단지 설립을 이끌었다.

초대 과학기술계 리더로 그가 내세운 운영 철학은 연구 자율성, 연구 안정성, 연구 환경 조성이다. 공업화, 산업화 추진 정책 속 과학기술인이 절대 부족했던 시기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과학자들에게 조국의 미래에 함께 해 달라고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국내로 이끌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지지속 연구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됐다. KIST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불야성을 이뤘고 연구진의 헌신적인 활약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루는 기반이 됐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위상은 공고하지 않다. 강대국의 기술 패권 경쟁, 중국의 무서운 질주, 그 속에서 좁아져 가는 우리나라의 입지, 다툼만 무성한 정치권 등 대한민국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 과학기술계 곳곳에서 다시 한 번 과학기술 중심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달 22일 과학기술계의 의지가 십시일반 모여지며 '최형섭 장관 서거 21주기 회고 토론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KIST에서 제작한 최형섭 장관 서거 20주기 기념 영상을 시청하며 그를 기렸다. 처음으로 알았다는 참석자부터 그의 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자, 그를 기념하는 도로를 지정하고 그의 철학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출연연 기관장들 사이에서도 그의 철학과 과학기술 정책의 뿌리를 되짚으려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그러면서 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읽어 보자는 기관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대덕넷은 △강대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총장 △이진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정책기획본부장 △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이창근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원장 등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읽은 과학계 인사들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 최형섭이 남긴 철학, 출연연 기관장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다

기관장들이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읽게 된 계기는 제각기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최형섭 장관의 실천적 리더십과 현장 중심의 실용연구를 해야 한다는 최 장관의 철학에 깊이 공감했다. 

서거 21주기 토론회에 참여했던 정희권 이사장은 그 계기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접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최형섭 장관이 단순한 과학기술 행정가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설계한 전략가였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며 "연구는 논문보다 현장의 문제 해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양성광 원장은 책을 통해 국가 과학 정책과 실천을 구체화한 최형섭 장관의 업적에 존경심을 가지게 됐다며 "나와 우리 연구소도 올바로 연구하는 기풍을 마련하고, 산업계가 필요한 혁신 기술 개발로 성과를 더 많이 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대임 총장은 2011년 표준연 원장 부임 당시 책을 구해 학습하듯 정독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대덕단지 설립 철학이 지금 출연연 운영 방향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 책은 출연연이 과거에 부여받은 임무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 변화에 맞춰 출연연의 역할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이진환 본부장은 표준연 신입사원 시절, 당시 원장이었던 강대임 원장(현 UST 총장)의 권유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연구자가 석사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 전공을 바꾸는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최형섭 장관이 한국에 필요한 분야에 기여하기 위해 박사 전공을 바꿨다는 대목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작년 초 국립대전현충원을 참배한 이창근 원장은 최형섭 장관 묘비의 '연구자의 덕목'을 보고, 책을 찾아 읽게 됐다. 절판된 책을 KIST로부터 받아 최형섭 장관의 철학을 공유하기 위해 보직자들에게도 나눠줬다고 밝혔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최형섭 전 장관 묘비.[사진=대덕넷 DB]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최형섭 전 장관 묘비.[사진=대덕넷 DB]

◇ "직위가 아니라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책 속에서 최형섭 장관은 연구자의 기본 덕목에 대해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오늘날에도 이 다섯 가지 덕목은 유효할까. 기관장들은 지금 과학기술계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항목도 있고, 시대에 맞게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공통으로 가장 강하게 공감한 덕목은 '직위보다 직책에 충실하라'는 태도였다. 

강대임 총장은 맡은 일이 크든 작든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태도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주인의식을 갖고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세 명의 벽돌공 이야기를 통해 "일의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일을 해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정희권 이사장 또한 책 속에도 소개된 미국 벨연구소의 노벨 수상자들이 관리자 직위를 거절하고 연구에만 몰두했던 사례를 들며 "이 덕목은 실제 과학기술 생태계의 품질을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고 강조했다.

'생활 연구인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기관장도 있다. 이창근 원장은 "연구자는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달라야 한다. 연구자라면 연구실 밖에서도 연구 주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잠결에도 무의식 중에 해법을 떠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라며, 오늘날 우리가 다시 돌아봐야 할 연구자의 자세라고 밝혔다. 

반면,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연구자의 덕목은 현재 세대에는 맞지 않다는 의견도 나왔다. 

양성광 원장은 "모두 오늘날 필요한 덕목이나, 시대적 환경 변화에 따라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항목은 요즘 연구자들에게 강요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진환 본부장은 1980년 미국에서 제정된 바이돌법(Bayh-Dole Act)을 언급하며, 정부 지원 연구의 특허 소유권이 대학과 연구자에게 돌아가면서 기술이전과 창업 생태계가 활발해졌던 사례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과학기술인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주어져야 우수한 인재들이 과학기술 분야로 유입된다"며, "그렇지 않으면 결국 대부분의 인재가 의대로 쏠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연구 성과 확산, 연구자가 직접 알려야
지난해 최형섭 박사 서거 20주기를 맞아 제작된 영상. [영상=KIST]

책에서 최형섭 장관은 "연구자의 역할이 연구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기관장들 모두 깊이 공감하며, 오늘날의 연구자는 단순한 지식 생산자를 넘어 정책, 산업, 사회와의 접점을 인식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강대임 총장은 "기술사업화뿐 아니라, 공공 인프라나 정책 반영 등 연구 성과 확산의 전 과정에 연구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 성과가 제도나 산업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이 국회나 정부를 설득하고, 지속적으로 사회적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환 본부장 역시 "지금 사회가 작동하는 핵심분야인 입법부나 행정부에 과학자 출신이 많아져야 한다"며 연구자들의 사회 참여 중요성에 공감했다. 그는 "국회 내 과학자 출신은 손에 꼽는다. 과학기술이 국가 기반인 시대에 이는 심각한 문제다"고 밝혔다. 

정희권 이사장은 기술이 작동할 맥락과 영향까지도 설계하는 시민 과학자적 태도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그는 "책에서 최형섭 장관이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를 예로 들며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는 조국을 위한 책임과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며, 과학기술인이 정책·경제·사회적 파급 효과를 인식하며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 인프라의 지속정 성장을 강조한 이창근 원장은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알리고, 후학 양성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양성광 원장은 "과학자가 국가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역할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장해야 한다"며, 과학으로 세상을 혁신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밝혔다.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는 단순한 회고록을 넘어, 과학기술의 가치와 연구자의 책임을 일깨우는 시대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출연연 기관장들은 한목소리로 최형섭 장관의 철학을 후대 과학자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KIST에서 1995년 발행한 故 최형섭 장관의 책.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사진=대덕넷 DB]
KIST에서 1995년 발행한 故 최형섭 장관의 책.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사진=대덕넷 DB]
 
대덕넷은 이날 김대호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정준기 뉴라진 부사장과 함께 최형섭 장관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왼쪽부터) 김대호 감사, 이석봉 대표, 정준기 부사장. [사진=대덕넷]
대덕넷은 이날 김대호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정준기 뉴라진 부사장과 함께 최형섭 장관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왼쪽부터) 김대호 감사, 이석봉 대표, 정준기 부사장. [사진=대덕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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