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기술 도공열전] 1. 포항제철②
일관제철소 핵심 고로 설계 김철우 박사, 공정 자동화 이봉진 박사

재일교포 2세 김철우 박사, 6·25 때 일본 밀항 이봉진 박사
日에서의 보장된 삶 버리고 정부 요청에 포철건설에 인생 던져
역할분담으로 1973년 포철 1고로서 '산업의 쌀' 붉은 쇳물 터져
김 박사, 간첩 옥살이 후 日귀국했다 제철인재육성 요청에 영주귀국
이 박사 "정부 배려 日회사 보다 못했지만 조국 위한 삶 후회없다"

포스코로 돌아온 (맨 오른쪽) 김철우 박사의 모습.[사진=책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 발췌]
포스코로 돌아온 (맨 오른쪽) 김철우 박사의 모습.[사진=책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 발췌]

"조국을 위해 좋은 일이니 도와드리겠다."

1971년 일본 도쿄대에서 근무하던 고 김철우 박사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휴직계를 던졌다. 박정희 정부의 끈질긴 설득을 마침내 수락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공업화를 본격 추진하면서 포항종합제철소(지금의 포스코) 건설을 추진 중이었다.

당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이 그를 찾아와서 간곡히 도움을 청했다. 롯데의 신격호 사장도 "박대통령이 한국에서 제철소를 해보라 엄명했다.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친분이 있던 윤동석 서울대 교수는 일본으로 건너와 귀국을 종용했다. 윤 교수는 철과 야금 분야 권위자로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 발족 당시부터 위원으로 참여했고 나중에 포항제철 부사장도 지냈다. 

◇ 박정희 "철강 최고 전문가 유치하라" 특명

포스코 자료를 보면 박태준 사장이 김 박사를 설득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그리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 박사와 박 사장의 첫 만남은 1965~1966년께 이뤄졌다. 도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김 박사는 후식으로 못 보던 과일을 봤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자 박 사장은 ‘이건 망고라는 과일입니다’ 라고 답했다. 이렇게 김철우와 포스코의 인연은 ‘망고’에서 시작됐다."(포스코 뉴스룸)

김 박사는 포항종합제철소 제1 고로 건설에 투입됐다. 정부는 고로에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뽑아내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유일한 적임자로 김 박사를 선택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철강 분야를 연구하는 민동준 연세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의 철강연구 접근을 불허했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이공계, 특히 기계분야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도쿄대에서 이공계를 졸업한 한국인은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김 박사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고 전했다.

김 박사는 재일교포 2세로 192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고로의 반응과 설계의 가장 기본조건 연구 실험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이었다. [사진=포스코]
김 박사는 재일교포 2세로 192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고로의 반응과 설계의 가장 기본조건 연구 실험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이었다. [사진=포스코]

김 박사는 재일교포 2세로 192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도쿄공업대학과 도쿄대학의 대학원에서 금속공학을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 문부기관 연구직(공무원) 겸 연구조수(교수 일과 학과 일을 보조하는 연구원)가 됐다. 지바현 실험실에서 고로를 연구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고로의 반응과 설계의 가장 기본조건 연구 실험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포항종합제철에는 또 한 명의 결정적인 기여자가 있다. 제철소 공정자동화를 구현해 포항종합제철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지니도록 만든 이봉진 박사다. 

이달 초 서울의 이 박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포항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난번과 이번에 소개하는 포철 건설 ‘도공’ 4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포철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고 지칠줄 모르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 박사의 회고담과 김 박사 회고록, 후학의 이야기, 사실에 기반한 포철건설 기록집 등을 통해 두 사람의 포철 건설 이야기를 정리했다. 

◇ 1960년대 日과 너무 차이나는 조국 현실에 비장함 다져

김 박사는 귀국한 뒤 오히려 포철을 제대로 건설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다름 아닌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서 처음 조국에 돌아왔을 때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를 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대환 전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의 기록집 ‘쇳물에 흐르는 푸른 청춘’ 가운데 김 박사 회고)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중공업연구실장 겸 포항제철 기술이사로 포철 1고로 설계를 시작했다. 이 때 그는 KIST에 이미 와있던 이 박사를 소개 받는다. 두 사람은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연결고리가 있는 데다 대한금속학회를 통해 이미 아는 사이여서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둘은 역할을 분담했다. 김 박사는 고로에서 녹은 쇳물이 롤러 등을 통해 틀로 가공되는 슬래브 과정까지를 맡았고, 이 박사는 그 뒷단인 슬래브를 압연하기 위해 필요한 압연기와 프레스력 조정, 철판냉각 등 기술문제를 담당했다. 여기엔 다양한 장비가 필요했는데, 일본어를 잘하는 기계전문가 이 박사가 제철소에 필요한 기계들을 들여오는 일을 했다.

이 박사는 천성이 엔지니어였다. 그는 "당시 친구들은 대통령을 꿈꿨지만 나는 지도자가 배를 띄우라면 실행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일본에 함께 간 친구와 우린 꼭 엔지니어가 되자고 약속했고, 나는 공대를, 그 친구는 물리를 전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봉진 박사는 자동제어기술 개념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과학자로 공정자동화 기술 일인자다. 우리나라 최초 NC 공작기계 국산화와 국산 1호 산업용 로봇도 개발했다.[사진=김지영 기자]
이봉진 박사는 자동제어기술 개념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과학자로 공정자동화 기술 일인자다. 우리나라 최초 NC 공작기계 국산화와 국산 1호 산업용 로봇도 개발했다.[사진=김지영 기자]

1933년생인 그는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도쿄대 기계공학과 입학했다. 이후 동 대학의 대학원을 다니며 재일교포 사업가가 운영 중인 흥아공업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 서울시 요청으로 서울의 2만 세대 도시가스 설비를 구축하러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울시 설비 구축을 마친 뒤 일본으로 돌아가기 직전 오랜 친구이자 KIST 첫 유치과학자인 성기수 박사를 만나러 갔다가 귀국 제안을 받았다. 성 박사의 소개를 받은 최형섭 당시 KIST소장은 때를 놓치지 않고 KIST에 와서 일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대부분의 해외 과학자들처럼 언젠가는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한국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일본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1968년 5월 입소해 KIST 자동제어연구실의 리더를 맡게 됐다"고 돌이켰다.

그는 KIST에서 근무하다 "종합제철소를 지으려 하는 박태준 사장을 보좌해 달라"는 최 소장의 제안에 따라 포철 건설의 임무를 맡게 됐다. 포철 건설의 기본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전역에 있는 제철소란 제철소는 다 방문했다고 했다. "제철소의 순간적인 돌풍으로 쇳가루가 눈에 들어가 실명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제철소 전 과정의 자동화를 꼭 해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박사는 포항제철 간부들을 데리고 일본 제철소의 설비와 제품생산 공정을 돌아보면서 포항제철소 설비 만큼은 컴퓨터로 조종할 수 있는 자동화 설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사장은 공감했으나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으니 반 자동화하고 후일 전 자동화를 하도록 차질 없이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이 박사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박 사장을 설득했다. 슬래브는 1100~1300도까지 가열한 후 쓰임새에 따라 압연기로 자동차용은 박판(1~3mm), 선박이나 군 장비 용도는 후판(2mm 이상) 으로 압연 하는데 이 작업을 수동으로 하면 숙련자의 경험에 따라 질이 결정돼 균일하게 만들기 어렵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직접 온도계로 슬래브 온도를 제어하고, 후판과 박판을 만들기 위해 기계적 압력을 수동으로 조절해야 한다.

◇  김철우,  간첩 혐의로 포철 고로 준공식 대신 감옥행

일본 기업들은 한국 정부의 예산으로 어떻게 자동화 설비까지 실현할 수 있겠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 박사가 방문한 무로란 제철소는 "1912년 만들어진 무로란 제철소야 말로 현재 한국의 자금으로 가장 적합한 규모와 수준"이라고 빈정 상하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는 "우리는 이런 낡은 수준의 제철소를 지으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구체적으로 센서를 장착해 컴퓨터로 온도를 확인하고 후판과 박판 사이즈만 입력하면 자동으로 압연되는 그런 시스템을 제시했다. 이 박사의 전문적 식견에 일본 제철소 관계자들은 꼬리를 내렸다. 이 박사는 계측용 센서도 통일해 구입 후 반자동에서 전자동으로 서서히 교환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 수준에 맞췄다. 이와 함께 기계제품 수명이 다 하면 알람을 통해 교환할 수 있도록 컴퓨터 부품관리 시스템을 주문했다. 

2년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무렵, 박 사장을 을지로에서 만났다. 이 박사가 "제철소가 잘 돌아가냐" 물었더니 박 사장은 "그렇게 제대로 만들어 놨는데 잘 안 돌아 갈리 없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이 박사는 "이런 대화를 나누며 둘이 서로 유쾌하게 웃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김 박사는 최종적으로 연간 156만톤의 철광석을 처리하고, 95만톤 선철 생산 등이 가능한 높이 110m 가량의 고로를 만들었다. 1972년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가장 높은 삼일 빌딩과 같은 높이인 이 고로에서 생산되는 연산규모는 103만톤이었다. 세계 제일의 단일 제철소인 미국 인랜드 스틸(1495만톤)에 비하면 생산량이 14분의 1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공업한국 기틀을 다진 자랑스런 설비였다. 

KIST 책임연구원들과 함께 찍은 이봉진(맨 왼쪽) 박사. 가운데 당시 KIST 소장이던 최형섭 박사가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이봉진 박사]
KIST 책임연구원들과 함께 찍은 이봉진(맨 왼쪽) 박사. 가운데 당시 KIST 소장이던 최형섭 박사가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이봉진 박사]

하지만 영광도 잠시.

김 박사는 포철 준공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준공 한 달 전에 그는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다. 북한에 살고 있는 혈육을 만나기 위해 1970년 잠시 들른 북한에서 황해제철소를 간 일로 간첩으로 몰려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일본의 지인들이 한국대사관에 탄원서를 넣었지만 당시는 대공 혐의점에 대해 선처를 바라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는 6년 6개월이 지난 1979년 8월이 돼서야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함께 일한 이 박사도 날벼락을 맞았다. 북한 간첩으로 몰려 특무대에 잡혀가 감금을 당했다. 그나마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무혐의 처분을 받아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풀려난 새벽, 참담하게도 김 박사가 간첩으로 잡혀가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아야 했다"며 눈을 감았다. 이 박사는 김 박사의 구속으로 그의 빈자리 역할까지 맡아서 해야 했다. 

김 박사는 석방 이후 일본 지인들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회복해 도쿄대에 복직했다. 한국 정부는 그런 김 박사에게 포철의 발전을 이끌어 달라면서 다시 한국으로, 이제는 완전 귀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박사의  일본 지인들이 발끈하며 말렸다. 하지만 김 박사는 "나는 철을 사랑하네"라는 말을 남기고 1980년 완전히 귀국해 포철로 돌아갔다. 그는 이후 사건 발생 39년이 흐른 2012년이 돼서야 사면복권을 받았다. 

포철에 복귀한 그는 기술고문과 기술담당 부사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철강산업의 세계적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특히 포스코 기술연구소(현 기술연구원) 초대소장을 맡으면서 인재 양성에 힘썼다. 연구자 재목을 알아보고 미국,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유명한 연구소와 대학에 연구원들을 파견시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하는 등 사람들을 길렀다.

앞서 언급한 철강분야 전문가 민 교수는 "당시 김 박사는 사람들을 키워냈다. 그때 키워낸 사람들이 포스코의 실장, 부장, 기술원장 등 중역을 맡았다"며 "포스코의 보이지 않는 성과 뒤에 김 박사의 그림자가 많이 녹아있다"고 말했다. 민 교수 역시 김 박사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제선, 제강을 전공하고 돌아온 후 세계적 재료공학자로 활약하면서 철강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김 박사는 이후 70세의 나이까지 연구를 놓지 않았다. 포스코에서 포항산업과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고문이 아닌 연구직을 자원해 직접 실험실에서 탄소나노튜브(CANT)에 대해 연구했다. 이후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의 고문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을 맡아 한국과 일본의 중소기업 기술 교류에 힘썼다. 

포스코를 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 전액을 우리나라와 아시아 지역의 중견,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 기술이전기관인 한국테크노마트에 출연하기도 했다. 

◇ 이봉진, 쇳가루에 실명위기 겪으며 일본 제철소 벤치마킹

(오른쪽)김철우 박사는 간첩으로 몰려 6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조국의 부름에 영주귀국해 제철인재를 키우고 한국 철강산업의 세계적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사진=대덕넷 DB]
(오른쪽)김철우 박사는 간첩으로 몰려 6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조국의 부름에 영주귀국해 제철인재를 키우고 한국 철강산업의 세계적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사진=대덕넷 DB]
이 박사는 포철에 공정자동제어기술을 최초로 들여온 연구자로 기록됐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 NC(수치정보로 기계운전을 자동제어 하는 기술)공작기계 국산화를 주도했으며 국산 1호 산업용 로봇도 개발했다. 한국정밀공학회도 주도해 신설했다.

이런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면서 정부의 제안으로 맡게 된 일자리마저 잃고 말았다. 이 박사는 "NC공작기계 국산화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해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로봇전문가 행사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KIST로부터 연구실이 사라져 돌아와도 방이 없고 창원에 있는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현 한국기계연구원)로 발령이 났으니 가라는 연락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호통쳤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소식을 접한 일본의 산업용 로봇과 정밀기계 기업 화낙은 한창 연구할 시기인데 아쉽다며 기초연구소를 세워 인재들을 모으고 있으니 와달라고 제안했다. 이럴까 저럴까 하던 와중에 당시 KIST소장이던 천병두 박사도, 최형섭 과학기술부 장관도 정국 상황이 뒤숭숭하니 잠시 다녀오라고 조언해 마침내 승낙했다. 일본 화낙에 기술고문으로 스카우트된 것이다. 

5년 후 이 박사는 박태준 포철 사장으로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화낙은 한국으로 가도 좋으나 기술고문으로만 남아있어 달라며 직함을 유지해줬다. 귀국하면 포항제철 소장대우 및 포항공대 교수직 겸직 등이 보장돼 있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오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 박사는 그 길로 아예 제철과 관련된 일에서는 손을 뗐다.

이 박사가 모아온 연구노트와 일본에서 공부한 흔적들.[사진=김지영 기자]
이 박사가 모아온 연구노트와 일본에서 공부한 흔적들.[사진=김지영 기자]

그는 효성중공업과 가하 컨설팅 등에서 고문역할을 했으며, Lee Engineering이라는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다. 기업의 상품개발 프로젝트와 공정 자동화에 필요한 부품가공을 위한 연구소 컨설팅, 일본 기술경영 노하우를 기업에 전수했다. 91세 나이에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로봇자본주의', '보이지 않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해보자'등 다양한 책을 집필했으며 현재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일본 출장을 다니는 등 과학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  "정부의 배려 충분치 않았지만 경제 초석 놓은 후회없는 삶"

매년 6월 9일은 '철의 날'이다. 1973년 포항제철에 설치된 우리나라 현대식 고로에서 첫 쇳물이 생산된 날을 기념해 지정했다. 철광석 등을 넣어 쇳물을 만들어내는 용광로 방식의 고로는 대한민국 철강역사의 산실이자 경제발전의 포석으로 1973년부터 2021년 12월 29일까지 운영됐다. 포항 1고로는 기본 수명 2배 넘게 사용되며 산업의 쌀을 생산,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이 고로 건설의 도공들은 조국 근대화에 공감하며 몸을 던졌지만 조국의 보답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박사는 "일본의 화낙은 실제 재직기간이 고작 5년이었지만 지금도 종신연금을 보내오고 있다"며 "그런데 그 좋은 조건을 떨치고 귀국한 나에게 조국은 약속과는 달리 너무도 소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던 젊은 날의 결심을 떠올리며 결코 후회는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끌려가다 도망쳐 그 길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인간으로서 어찌 서운한 마음이 안들 수 있을까. 하지만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고 그 파도 넘실대는 현해탄 너머로 조국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꼭 돌아와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조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귀국은 결국 나의 선택이었고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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