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기술 도공열전] 1. 포항제철①
포철 건설의 기틀 놓은 김재관 박사·윤여경 실장

김 박사 포철건설 아이디어, 윤 실장 기술계획서와 경제성 검토
포항제철 건설 미션 받은 30대 연구자들, 20년 안목의 계획 세워
대일청구권 자금 받기 위한 일본 제철 3사 심사의 벽도 넘어
"국내 제조업 성장과 세계적 철강기업 탄생 주역은 과학자"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대한민국 최초 종합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흘렀다. 종합제철건설 아이디어를 만들고 경제성을 검토, 자동화설비, 포항제철 제1고로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과학자들이었다. [사진=김재관박사 기념관]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대한민국 최초 종합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흘렀다. 종합제철건설 아이디어를 만들고 경제성을 검토, 자동화설비, 포항제철 제1고로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과학자들이었다. [사진=김재관박사 기념관]
"임자, 수고했어."(고 박정희 대통령) 
"아닙니다."(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

1973년 7월 3일 오후 2시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안로 포스코 포항종합제철소. 1기 설비 종합준공식 후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이 감격에 젖어 나눈 대화다. 

박 대통령이 이어 "이 고로의 불꽃이 국가재건, 민족중흥의 불꽃이야"라고 강조하자 박 회장은 "이 불꽃을 끝까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인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종합제철소 건설을 기획했다. 그의 구상은 1965년 미국 피츠버그의 철강공업 지대를 돌아보고 온 이후 구체화 됐다고 한다. 
 
황량한 모래밭이던 포항 영일만에는 이제 연간 조강 생산 103만톤(t) 규모의 제철소가 우뚝 섰다. 쇳물에서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생산 체제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제철소였다. 포항제철소 기념 행사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이 얼마나 이를 일대 '사건'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정부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경) 포항제철 준공 (축)'이라고 쓴 대형 아치를 세웠다. 준공식 참석 내빈들을 위한 서울~포항 간 특별열차도 운행했다. 

이렇게 부산을 떨 만도 했다. 포항제철은 가동 1년 만에 당시 외자 투입비용(1억2370만 달러)을 상쇄하고도 남는 242억원의 흑자를 실현했다. 이후 회사 이름을 포스코(POSCO)로 바꾸고 2023년 기준 연간 조강 생산량 1771만t의 포항제철소, 2297만t의 광양제철소를 보유하면서 한국 최대이면서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부상했다.  
 

[자료=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0년 보고서 '포항제철의 기술능력 발전과정에 관한 고찰']
[자료=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0년 보고서 '포항제철의 기술능력 발전과정에 관한 고찰']
양질의 철강을 저렴하게 구입한 국내 제조업은 자동차, 조선 등을 만들어 수출하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은 국내 제조업의 성장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00달러에서 2023년 3만4000달러로 성장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우리는 포스코 박태준,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 롯데 신격호 등의 스타들을 떠올리지만 구체적으로 산업을 전망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등 밑그림을 그린 것은 다름 아닌 과학자들, 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일하던 21세기 과학기술 도공들이었다.

이 화려한 준공식의 한달 가량 전인 그해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흘렀다. 굉음과 더불어 오렌지색 섬광이 터지면서 '산업의 쌀'이라는 쇳물이 용광로에서 흘러 내렸다. 지금은 산업구조가 바뀌어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철이 산업의 쌀이었다. 포항종합제철소 준공을 축하해 발행된 콜로 기념우표(10원짜리)에는 제철소의 핵심인 고로에서 첫 쇳물이 나오는 순간이 담겨있다. 

이 고로 준공식을 감격의 눈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종합제철 건설 아이디어를 만든 고 김재관 박사(당시 KIST 특수기자재 연구실장), 건설에 필요한 기술계획서와 경제성을 검토한 고 윤여경 박사(당시 KIST 정보분석실장), 자동화 설비를 설계한 이봉진 박사(당시 KIST 자동제어연구실장), 포항제철소 제1고로 건설을 주도한 고 김철우 박사(당시 KIST 중공업연구실장 겸 포항제철 기술이사)였다. 

◇ 김재관-윤여경 포철 건설 틀을 세우다

KIST 1대 해외유치과학자들. 흰 동그라미 왼쪽이 윤여경 실장, 오른쪽이 김재관 박사다. [사진=KIST 제공]
KIST 1대 해외유치과학자들. 흰 동그라미 왼쪽이 윤여경 실장, 오른쪽이 김재관 박사다. [사진=KIST 제공]
포항제철소 건설에서 김재관 박사의 역할은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라인강의 기적'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함보른 탄광에서 일하던 파독 광부들 앞에서 연설하다가 눈물을 보였던 그 역사적인 순방 길이다. 모든 일정을 마친 박 대통령은 귀국 전 날 뮌헨의 숙소에서 독일 유학생들과 교민을 위한 조찬을 마련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 없이 해주십시오." 박 대통령의 요청에 한 청년 과학자가 나섰다. 뮌헨 공대에서 금속학을 전공하고 세계적인 제철소인 데마크(DEMAG)의 종합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김재관 박사였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철강산업 활성화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는 데마크가 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인천제철을 만들 당시 관여한 이후 종합제철소 계획안을 영문으로 작성해 두고 있었다.

그는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하면서 미군의 무기가 전부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특수강에 눈을 떴다.

"전쟁으로 다 부서진 나라에는 제철 생산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하다못해 판잣집을 지어도 못과 철판이 있어야 하고 공장과 도로, 다리 건설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지요. 그렇기에 제철소를 짓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했습니다."(김재관 박사 기념관 어록 중에서)

박 대통령의 독일 순방 2년 후인 1966년 KIST가 세워졌다. 초대소장인 최형섭 박사는 대통령의 지시로 KIST를 채울 해외의 한국인 과학자 유치에 나섰다. 18명의 과학자를 1차적으로 유치했는데 이 가운데 김재관 박사는 박 대통령이 직접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관 박사에게 맡겨진 미션은 '종합제철건설계획서 검토'였다. 당시 제철과 관련된 전문가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KIST밖에 없었다.

'정부는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 건설을 최우선 육성산업으로 선정했다.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장관 직속으로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을 설치하면서 정부는 외국의 모든 종합제철건설계획서를 검토할 것을 KIST에 요청했다.'(KIST 50년사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철강시설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황해도에 설치된 겸이포제철소다. 제철소가 철광석 산지인 북한 지역에 편중돼 분단 이후 남한에는 변변한 생산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내 철강수요는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강산업 건설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준비했지만 미국 원조당국의 반대에 여의치 않았다.

이에 따라 새 부총리로 임명된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종합제철소를 만드는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KIST가 김재관 박사에게 종합제철건설계획서 검토를 하게 한 배경이다.

◇ 종합제철소를 만들어 달라 최형섭 소장의 주문

김 박사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재학하다 6.25사변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학업을 이어가던 중 미군부대 통역을 맡다 미군 무기가 전부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특수강에 눈을 떴다. [사진=김재관 온라인 기념관]
김 박사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재학하다 6.25사변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학업을 이어가던 중 미군부대 통역을 맡다 미군 무기가 전부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특수강에 눈을 떴다. [사진=김재관 온라인 기념관]
1969년 6월 김재관 박사가 최형섭 소장의 긴급 호출을 받고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엔 KIST 첫번째 해외 유치과학자 중 유일한 경영학 전공자인 윤 실장도 있었다. 윤 실장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경제 이론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유학을 갔다. 윤 실장은 경제적 타당성을, 김재관 박사는 기술적 타당성을 담당했다. 

"한달 동안 보고서만 봤어요. 한국제철 국제차관단(KISA)은 자신들이 자금조달까지 책임을 져야 해 초기 투자를 최소화하느라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생산성이 낮은 연산 60만t 조강이라는 계획을 내놓은 것을 확인했죠." (KIST 자료 가운데 윤여경 생전 인터뷰)

김재관 박사는 KISA 보고서가 연간 조강 생산량 60만t으로 생산성이 낮아 경제적 타당성이 없는 계획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의 제철회사 근무 경험과 수집 분석한 자료들을 토대로 연간 조강 생산량 103만t로 한국 산업발전 토대가 될 만한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윤 실장은 경제분석실을 통해 제철소 건설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 한국 종합제철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와 우리나라 수입통계와 생산통계를 분석해 국내 철강재 수요 자료를 작성했다. 철강재 수요가 기본 조강 생산량인 100만t을 훨씬 넘는다는 통계를 추출해냈다.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추정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소요자금 외자 1억2037만 달러와 정부 예산 633억원 가량의 조강 103만t 종합제철 계획서를 완성한다. 30대 중반인 젊은 연구자들은 최소 10년, 최대 20년 이후의 자동차 및 조선에 쓰일 특수강까지 만드는 제철소 비전을 그려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차관이 어려워져 제철소 건설은 벽에 부닥쳤다. 모두 낙담해 있을 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것이 박 회장이었다. 그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통해 대일청구권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지금도 일제 피해배상 문제와 관련해 논란은 여전하지만 당시는 이 방법이 아니면 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했다. 김 부총리는 마침내 외자 1억2370만 달러를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조달하겠다고 보고해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냈다.

일본이 한국이 마련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 타당성을 도쿄에서 열리는 양국간 경제장관회의에서 결정하겠다고 전해왔다. 일본의 3대 제철회사(후지제철, 야하다제철, 일본강관-뒷날 '신일본제철'로 합병)가 참여하는 타당성 검토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단장으로 노인환 공공차관 과장, 김철 철강계장, 김재관 박사, 윤 실장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어를 못했지만 영어로 제철소 건립 타당성을 충분히 피력했다. 일본 제철회사들은 '일단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반응이었다. 얼마 후 열린 한일 각료 회의에서 양국은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에 합의했다.

"일본이 대일청구권 자금 지급, 즉 전쟁 때 한국에 진 빚을 갚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한국 외에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야 했거든요. 그들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는 수익이 보장되는 곳을 제시해야 했고 여러 회의 끝에 결국 8억 달러를 주는 것에 동의했죠.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철강 생산을 위한 유일한 돈이었습니다."(김재관 박사 온라인 기념관 인터뷰 중에서)

◇ 20년 내다본 종합제철소 만들다

포스코 건설 시작 사진 (맨 왼쪽이 김재관 박사). [사진=김재관 박사 온라인 기념관]
포스코 건설 시작 사진 (맨 왼쪽이 김재관 박사). [사진=김재관 박사 온라인 기념관]
김 박사의 역할은 일본에서 제철소 건립을 위한 각종 장비를 구입할 때 더욱 빛을 냈다. 대일청구권을 사용해 구매하는 장비는 일본 전문가의 동의를 받아 일본 제품을 우선적으로 선정하도록 돼있었다. 그럼에도 김재관 박사는 전문가적 식견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불필요한 장비 구매를 피했다.

일본이 구매하기를 원하는 핫코일 생산장비 구매를 놓고 한차례 공방이 벌어졌다. 김재관 박사는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넓은 폭의 핫코일 생산 장비 구매를 관철했다. 그는 "일본이 제시한 핫코일 생산장비로는 세탁기나 소형냉장고에 사용할 제품만 생산할 수 있다. 최소한 소형승용차 외장용 제품까지는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박을 만들기 위해 일본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후판보다 두꺼운 후판 생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 측이 제안을 잘 받아들이지 않자 윤 실장과 더불어 한일 공동구매추천위원을 사임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박 회장이 중재에 나서 일본 전문가들이 물러서면서 일단락됐다.

"김재관 박사는 종합제철소 계획 최소한 5~10년은 내다보고 세워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미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과 조선산업에 대한 미래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오늘은 그의 구상 그대로 실현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KIST 자료의 윤여경 생전 인터뷰 중에서)

윤 실장이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 종합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우리나라 전문가는 단 한 사람, 김재관 박사뿐"이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이유다. 

조강 베이스 103만t은 물론 용광로 1호기, 압연공장, 후판공장 등 초기 주요 시설의 배치 역시 김 박사가 직접 포항에 내려가 허허벌판의 대지 위에 도면을 보면서 박은 말뚝들이 기준이 됐다. 그는 안정적인 원료공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호주와 석탄과 철광석의 장기공급 계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공들은 빛나는 순간에 나타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내는 정치인이나 관료의 그늘에 가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재관 박사는 이런 현실이 못내 서운했는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겼다. 

"일본 대표단이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이다. 경제기획원에서 조인식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데, 부총리가 김 박사와 나를 자신의 뒤에 서라고 했다. 아무 관련도 없는 정부 관리들이 부총리 뒤에 서려고 한 명, 두 명 끼어드는 바람에 우리는 옆으로 밀렸다. 그리고 정작 셔터가 눌려졌을 때, 김 박사는 앵글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맨 끝에 겨우 들어서 있었다. 일등공신이자 사실상 주인공인 김재관 박사의 모습이 기념사진에 보이지 않은 이유다. 김 박사는 이를 두고두고 섭섭해 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김 박사의 공로는 내가 확실하게 보증한다." (KIST 자료의 윤여경 생전 인터뷰 중에서)

 

윤여경 KIST 경제분석실장은 1969년 6월 3일 경제기획원 내에 신설된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종합제철 프로젝트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맡았다. 윤여경 KIST 실장과 김학렬 부총리(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김재관 박사(뒷줄 제일 왼쪽) 등 전담반 구성원들의 모습. [사진=포스코 뉴스룸 홈페이지]
윤여경 KIST 경제분석실장은 1969년 6월 3일 경제기획원 내에 신설된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종합제철 프로젝트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맡았다. 윤여경 KIST 실장과 김학렬 부총리(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김재관 박사(뒷줄 제일 왼쪽) 등 전담반 구성원들의 모습. [사진=포스코 뉴스룸 홈페이지]
철강 분야 전문가들은 두 연구자의 노력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세계적 재료공학자이자 철강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하는 민동준 연세대학교 교수는 "대일청구권을 사용해 장비를 구입해야 했으니 일본에서는 그 돈을 다시 회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문가였던 김재관 박사는 미래를 보고 종합제철소를 만들었고 결국 세계적 제철강국을 실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철소 건설은 일본과 미국 등 모두가 반대가 심했었다. 그럼에도 철강산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남다른 리더십으로 대한민국 최초 종합제철소의 기틀을 세운 것은 대단한 용기와 애국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국내 제조업의 성장과 세계적 철강기업 탄생의 이면에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는 8~9년 전 김재관 박사와 윤 실장을 만난 적이 있다. 종합제철소 이야기를 쉼 없이 쏟아내던 두 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설계도를 들고 포항제철 현장을 누비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눈은 초롱초롱하고 목소리가 힘에 넘쳤다. 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한 뒤 그대로 눌러 앉아 터전을 잡으려 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박사는 '국가표준제도(헌법 제127조 제2항)' 헌법 및 '국가표준기본법'을 설계 및 건의하고 명문화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한국표준연구소를 설립을 맡은 뒤 초대소장과 2대 소장까지 역임했다. 사진은 USAID 관계자 방문 때 설명하고 있는 김재관 박사(1976.4.). [사진=김재관 박사 온라인 기념관]
김 박사는 '국가표준제도(헌법 제127조 제2항)' 헌법 및 '국가표준기본법'을 설계 및 건의하고 명문화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한국표준연구소를 설립을 맡은 뒤 초대소장과 2대 소장까지 역임했다. 사진은 USAID 관계자 방문 때 설명하고 있는 김재관 박사(1976.4.). [사진=김재관 박사 온라인 기념관]
김재관 박사는 철강전문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표준을 세우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국가표준제도(헌법 제127조 제2항)' 헌법 및 '국가표준기본법'을 설계 및 건의하고 명문화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한국표준연구소를 설립을 맡은 뒤 초대소장까지 역임한 그는 국가표준제도에 관한 국제적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윤 실장은 이후 KIST에서 부소장 역임했으며, 산업과제 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세부연구 과제를 만들었다. 또 한국 벤처캐피탈 회사의 효시가 된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K-TAC)의 설립을 주도하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포항종합제철소 준공식과 대덕연구개발특구(당시 대덕연구단지)의 준공식은 모두 1973년이다. 지난해 두 지역에서 각각 탄생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업이 제품을 만들어 내려면 '산업의 쌀'이라는 철이 있어야 하고, 과학기술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제철보국(製鐵報國)'과 '과학입국(科學入國)'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쌍두마차였다.

포스코는 현재 수소로 철을 만드는 '하이렉스(HyREX)' 공법의 수소환원제철 시대를 준비 중이다. 이 공법이 상용화하면 제철소의 상징과도 같던 고로(용광로)가 사라진다. 포항제철소의 1고로는 지난 2021년 12월 수명이 다했다. 하지만 그 용광로의 섬광은 우린 산업경제사를 아직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반세기 가까이 5억 5520만t에 육박하는 쇳물을 생산하면서 경제성장을 견인했고 그렇기에 '민족고로', '경제고로'라고 불린다. 다음 편에서는 이 고로를 제작한 김철우 박사와 포항제철소의 자동화 설비를 설계한 이봉진 박사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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