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전공 뛰어넘어 기능인에서 지성인이 되어야
'박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에의 기여를
선진국에 걸맞는 지식 생산국으로···인문학과 독서 필요

스탠포드 대학 물리학부 건물 1층에는 기증자인 러셀 배리안의 동판이 붙어있다.그에 대해 물리학자, 발명가,인본주의자라고 설명돼 있다. 그는 스탠포드 물리학과 출신으로 핵자기공명장치를 개발하고 레이다를 개발해 연합군의 2차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배리안 어소시에트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후에 지멘스에 합병된 세계적 의료기가 회사인 배리안 메디칼 시스템즈의 모체이다. 그는 부모의 영향으로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실행했고, 사후에 그의 유지를 따라 5백 에이커가 넘는 땅이 기부되며 오늘날 캘리포니아 캐슬 락 주립공원이 만들어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사진=이석봉 기자]
새 대통령 취임이 일주일도 안됐는데 사회 분위기가 많이 변한 듯 하다. 적폐청산이란 다소 서슬퍼런 분위기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회로 차분해지는 느낌은 너무 주관적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수는 짧았다. 이명박 대통령 8천688자, 박근혜 대통령 5천196자, 노무현 대통령 5천103자 등에 비해 윤 대통령은 3천440자로 간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천121자이지만 당선되자 바로 취임해 준비 시간이 짧았던 만큼 비교에서 제외)

그런데 내용은 가볍지가 않았다. 이전 대통령들이 안 쓴 어휘를 썼고, 글의 전개도 국내를 벗어나 세계속의 대한민국을 강조하며 새시대의 전개를 예고했다.

윤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박애'이다. 이 단어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다.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기둥이다. 자유와 평등은 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신분 질서를 깨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똑 같은 인권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새시대의 선언이었다. 이 정신에 의해 인류사회는 전체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환이 시작됐고, 그에 따라 3권 분립 등의 새로운 시스템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에 의해 확보된 인권을 해당 국가나 지역에서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에 적용하기 위한 정신이 박애이다. 인종이나 민족과 관계 없이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고, 이에 의해 프랑스 혁명이 전세계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그 이후 전제정이 다시 등장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불이 붙기 시작한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인류의 가치관이 됐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시작하게 된 것도 자유 평등 박애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돌고 돌아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신생 독립국 미국의 진로에 영향을 미쳐 미국이 왕정이 아닌 공화정이 되는데 기여했고, 미국은 공화정을 기반으로 번영을 구가하며  2차 세계 대전의 승자가 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을 영향권 아래 두게 되며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이식시켰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왔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쟁을 겪으며 무에서 출발해야 했고, 아무 자원도 없던 나라로서는 생존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대한민국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을 갓 넘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가치는 ‘박애’라고 할 수 있다. 박애란 국가와 민족이란 기존의 경계를 넘어 인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이 이제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며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만큼 그에 걸맞는 기여가 필요한데 이를 표현한 어휘가 박애라고 할 수 있다. 박애주의는 선진국 기업이나 개인 등에 보편적인 가치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서양에서는 박애주의자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위키피디아만 해도 박애주의자 명단이란 어휘 설명이 있다. 이 가운데는 박애주의자로 이야기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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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경제잡지 포브스는 2020년1월 미국을 빛낸 25명의 박애주의자 명단이란 기사를 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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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계적인 자기계발 관련 저술가이자 코치인 앤소니 로빈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인 Tony Robbins에 세계 10대 박애주의자라며 자신이 선정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워렌 버핏, 레이 달리오,오프라 윈프리, 마크 베니오프(세일스포어닷컴 창립자),마이클 조단 등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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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뿐 아니라 과학자들 가운데도 박애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몇 년 전 미 스탠포드 대학을 둘러보며 놀란 적이 있다. 물리학과 건물에 동판이 하나 붙여져 있는데 그 사람을 소개하며 발명가 물리학자 인본주의자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공계 사람들에게서는 발명가와 물리학자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인본주의자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스탠포드 대학의 물리학과 건물 가운데 하나인 러셀 배리안 실험동 사진. [사진=이석봉 기자]
스탠포드 대학의 물리학과 건물 가운데 하나인 러셀 배리안 실험동 사진. [사진=이석봉 기자]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나 소아마비 백신을 발견한 조너스 소크 박사 등등이 과학자로서는 대표적 인본주의자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박애와 함께 과학을 강조했다. “도약과 빠른 성장은 오로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에 의해서만 이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며 우리의 존엄한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 혁신을 기반으로 국가 성장과 함께 세계 시민을 위한 박애를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공계 입장에서는 과학기술과 박애를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수 있다. 과학을 통한 인류기여는 교과서나 이상론으로는 작동하나 현실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과학계로서는 새로운 화두가 생긴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숙제로 받아들여 수동적으로 움직일지, 도약의 계기로 받아들여 질적 변환을 이루는 디딤돌로 삼을지는 과학계에 달렸다고 하겠다.

100세 철학자에 시대의 스승이라할 김형석 옹이 최근 중앙일보에 기고한 내용 가운데 이공계 사람들도 음미할만한 내용이 있어 일부를 발췌한다. 

"…역사에서 문화의 정신적 태양 책임을 담당한 국가는 다섯 나라뿐이다. 역사적 순서로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그 위치를 차지했다. 그 다음은 러시아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공산국가가 되면서 사상이 통제되고, 인문학이 사라지면서 그 후계국이 되지 못하고 미국이 대신하게 되었다.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문화국의 대열에 참여했다. 지금 세계는 이 다섯 나라의 문화 혜택으로 정신적 태양의 혜택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영국보다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독서를 못했기 때문에 문화적 후진국이 되었다.중남미와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정신적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다."

"…고전에 관한 독서가 없이 정신적 지도력을 함양한다는 것은 지성인의 본분을 모르는 처사다…150년쯤 후에 동양에서는 어떤 문화국이 세계를 대표하게 되겠는가…한글문화는 대학의 인문학 발전과 국민의 독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한글문화의 세계화가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다…우리 저서들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노벨문학상 그 자체이기보다 그런 수준의 한글문화 육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200년쯤 후에는 문화국이 세계의 중책과 주도 세력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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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 레이'를 저술한 민태기 박사는 이공계 인물 가운데는 드물게 인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은 사람이다. 그는 인세를 관련 학회에 전액 기부하는 등 나름의 방법으로 박애를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이공계가 전문 지식에만 머물러서는 기능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어야 전공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이를 기반으로 연구나 사업에서 결실도 보다 크게 얻으며 박애정신도 실천할 수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쪼록 이공계 사람들이 중인 의식을 벗고 역사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고, 박애란 인류애도 발휘하는 고차원의 삶을 향유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아울러 넓어진 식견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최대 난제라 할 수 있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과학으로 해결해 대한민국 전역이 과학기술로 잘사는 나라가 큰 그림을 그리는 주역이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될 때 인류를 위한 박애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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