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세종연, 지역학센터 설립 기획총서 1권 발간
분야별 20세기 대전지역 선각자 9인 발굴
지역 정체성과 가치 정립, 정서적 토대 구축

대전시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도시 형태로 시작, 오늘날 과학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대전세종연구원 지역학센터는 격변의 20세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전 지역의 선각자 9인을 발굴, 리더스피릿을 정리한 기획총서 제1권을 발간했습니다. 대전의 정체성과 가치를 정립하고 정서적 토대를 축적하기 위함입니다. 대덕넷은 모두가 기억했으면 하는 과학기술, 산업 분야 인물 한필순 전 원자력연 소장(글쓴이: 길애경 대덕넷 기자), 이영섭 전 진합 대표(성을현 충남대 교수), 김정우 전 동아연필 대표 & 우송학원 이사장(이용상 우송대 교수) 관련 내용을 세번에 걸쳐 전재합니다. '20세기 대전의 리더스피릿' 전권 e-북은 대전세종연구원 홈페이지 에서 다운 가능합니다.[편집자편지]
 
한필순(1933~2015). 한필순 소장은 원자력 기술자립 필요성의 혜안을 통해 열악한 국내 연구여건 속에서 연구환경을 마련하고 연구자들을 격려하며 원전연료, 원전계통설계까지 기술 자립의 기반을 마련했다.[그림= 길애경 기자]
한필순(1933~2015). 한필순 소장은 원자력 기술자립 필요성의 혜안을 통해 열악한 국내 연구여건 속에서 연구환경을 마련하고 연구자들을 격려하며 원전연료, 원전계통설계까지 기술 자립의 기반을 마련했다.[그림= 길애경 기자]
"한국형 경수로 탄생이 우리의 손에 달렸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기술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기술 식민지가 됩니다. 우리가 기술 독립국이 되기 위해 기필코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 앞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합니다.“
연구진 44명이 원자로 설계기술을 익히기 위해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 사로 떠나기 전 한필순 소장의 연설 중(1986.12.14.) 

◆ 에너지 독립 이끈 과학계 대부
2009년 12월 말, 과학계에 잭팟이 터졌다.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대규모 원전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기술자립을 통해 한국형으로 개발한 APR1400 원전 4기를 설계부터 시공, 준공 후 운영지원과 연료공급까지 맡기로 했다. 한국이 원자력발전(이하 원전) 가동을 시작한 지 30년 만이다. 직접 수출 효과만 200억 달러(24조 원 규모). 국내 중형 자동차 약 100만대, A380 초대형 비행기 약 60대, 30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180척 규모다. 과학계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기술자립에 기여한 연구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대한민국의 원전 기술자립 중심축에는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소(오늘날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이 있다. 그는 원자력 전공자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계와 원자력계 연구자들은 그를 ‘원자력과 에너지 기술자립의 대부’로 부르며 존경을 표한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 분야 기술자립은 꿈도 꿀 수 없었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원자력연에 처음 부임한 시기, 보여준 사람 중심의 연구환경을 마련한 사례는 지금도 후배들 사이에 회자 된다.

한필순 박사는 1982년 한국에너지연구소(미국의 압력에 이름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원자력을 뺌) 대덕분소장으로 임명돼 오면서 원자력과 인연을 맺는다. 1982년은 5공화국(군사정권) 시기로 과학기술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신군부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컸다. 심지어 미국은 약소국 한국에 원자력연 폐쇄(평화적 이용에 의구심)를 요구해 왔다.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연구소 모든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예산은 삭감(30억원, 2019년 5400억원과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수치)됐고 연구소 분위기는 암울했다. 연구자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연구소는 제대로 된 도서관(한필순 소장은 자신의 집 서재보다도 책이 없었다고 기억), 컴퓨터도 없을 정도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연구자들은 오후 5시만 되면 모두 퇴근하며 연구실 불이 꺼졌다.

한필순 소장은 우선 연구환경 개선에 나섰다. 연구에 필요한 설비를 설치하고 신간을 구입해 도서관을 채웠다. 연구자들의 건강을 위한 체육시설도 마련했다. 예산은 직전 창립 멤버로 12년 근무했던 ADD(국방과학연구소)와 사업연계를 제안하며 얻어왔다. 겨울철 시설공사가 이뤄지며 감사원 감사까지 시작됐다. 한 소장은 “행정 부서와 내 감사는 얼마든지 괜찮으나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사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한 소장의 으름장에 감사원들이 슬그머니 감사를 멈췄다. 

한 소장은 연구소 내부 연구과제 목록을 살펴봤다. 각자 진행하면서 제대로 이뤄지는 연구과제가 보이지 않았다. 과제 담당자에게 양산 사업 계획을 정리해 오라고 했다. 돌아온 것은 할 수 없는 이유만 가득 적힌 보고서였다. 한 소장은 백 가지 안 되는 이유가 아닌 긍정적인 아이디어로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과제에 집중할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해서 ‘중수로 핵연료 양산 사업’에 집중키로 결정된다.

연구자들은 ‘원자력 전공자도 아닌데 얼마나 버티겠어’라며 한 소장에게 시큰둥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 소장의 소신 있는 일처리,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의 솔직함에 연구자들도 하나, 둘 마음을 열었다. 연구실에 늦도록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연구에 몰입하는 연구자도 늘었다.
한 소장과 연구자들이 뜻을 모으며 중수로 핵연료 개발(수입 핵연료의 역설계 방식으로)에 성공한다. 하지만 어려움은 산 너머 산이었다. 아무리 복사해 잘 만들었어도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핵연료를 어떻게 믿겠느냐는 불신이 가득했다. 한국 연구진의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전의 거절로 국내에서 개발하고도 실험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 초크리버 연구소에서 실시된 핵연료 시제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원자력 기술 불모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연구자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보이지 않게) 대통령의 지지와 한전의 지원도 이어졌다. 중수로 핵연료에 성공하며 경수로 핵연료 개발, 독자적인 한국형 원자로 계통설계 연구가 추진된다. 에너지 독립을 위한 연구개발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원전 설계와 운영 등 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과학기술 위상도 한껏 높아진 게 사실이다. 과학계 후배들은 한필순 소장에 대해 기술독립 의지, 연구자로서 순수한 열정, 사람과 교육의 중요성을 아는 리더, 후배들에게 보여준 솔선수범의 리더십, 국가를 향한 충정이 큰 리더로 평가한다. 

◆ 전쟁 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던 소년
한필순은 1933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친가는 대대로 부농의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자 집안이었다. 한필순은 든든한 부모의 후원 속에 학업에 전념하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화학과 수학 과목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기부터 수재였던 막내 외삼촌과 평양에서 하숙하며 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학교에서는 일본어,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해야 하는 환경을 혼돈스러워 했다. 그가 기술 자립에 강한 의지를 갖게 된 이유가 짐작되는 부분이다.

그는 또래보다 말이 늦고 말더듬도 심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어린 시절 따랐던 외삼촌과 수학 선생님이 공산당에게 총살당한다. 12월 초 한필순은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피난길에 오른다. 곧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가족사진과 수학책 몇 권을 챙겼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와는 그대로 마지막이 됐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평생 그에게 아픔으로 남았다. 영화나 드라마의 모자(母子) 이야기, ‘엄마’라는 단어에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피난길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배고픔이라도 면해보라며 입대를 권했다. 17살 소년 한필순은 부산 육군훈련소로 이송됐다. 그렇게 아버지와도 이별이 됐다. 굶주림과 가족과의 이별로 제대로 먹지 못한 소년은 어느 날 영양실조로 부산육군병원에 입원한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그는 병원 보초를 자처했다. 그리고 피난길에 챙겨온 삼각함수 책 등 수학책을 읽으며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수학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한 군의관이 늘 수학책을 끼고 사는 소년을 눈여겨봤다. 소년의 수학지식이 상당함을 안 김효규 군의관(훗날 연세대 의료원장, 아주대 총장)은 자신이 맡은 연구실에서 일해 볼 것을 권했다. 절망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은 소년에게 희망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필순의 총명함, 성실함을 본 군의관은 그에게 군의학교를 가볼 것을 권유한다. 한필순은 교과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우수졸업생만 갈 수 있는 연구실 교육을 더 받을 수 있게 된다. 과학자로서 그가 평생 국가에 헌신하게 된 첫 계기였다. 

교육을 마친 그는 다시 군의관 김효규 선생의 연구실로 복귀한다. 전쟁 중 모든 물자가 부족했지만 제5육군 병원에 있던 김 선생은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생화학 연구에 집중했다. 김 선생과 한필순은 300여 종의 생화학 실험용 시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김효규 선생은 고아나 다름없는 한필순을 아들처럼 아꼈다. 넉넉하지 않은 장교 월급에 실험실 다른 연구자들이 모르게, 그리고 한필순의 양해를 구하며(혹시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을 염려하며) 영양을 보충하라고 용돈을 챙겨주기도 했다. 

김 선생은 한필순의 장래를 위해 광주의과대학 진학을 권했다. 김 선생은 한필순의 제대를 확인 후 광주의과대학의 이근배 교수에게 부탁하고 준비해 오던 유학길에 올랐다. 한필순은 김효규 선생을 생명의 은인, 학문의 스승, 사상과 철학의 아버지로 평생 따르며 존경했다. 김 선생은 한필순 소장이 평생 후배 연구자들에게 보여준 배려와 솔선수범의 리더십 롤 모델이기도 했다.

무일푼 고아와 다름없던 소년 한필순.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던 그는 의과대학이 아닌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군사훈련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 내에는 군인답지 않은 학생이 입학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교수진은 도서관에서만 사는 그를 유급 처리하기로 한다. 한필순의 유급을 막기 위해 안세희 교수는 그에게 전자공학을 개인지도 해준다. 안 교수 덕분에 한필순은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다. 유급을 면한 한필순은 공사 마지막 학기 레이더 정비과정에서 전자공학에 흥미를 갖는다. 당시 신상철 공군사관학교장은 한필순에게 서울대 물리학과 편입을 권유한다. 신상철 교장은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공군이야말로 과학자가 필요하다며 한필순에게 공부할 것을 조언한다. 

한필순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마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 유학생 선발시험에서 1등을 하며 미국 공군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한필순은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김성진(훗날 과학기술부 장관)과 룸메이트로 지내게 된다. 김성진은 육사에 이어 서울대 수학과에서 수재로 명성이 자자했다. 영어를 잘하던 김성진과 수학과 물리 문제를 막힘없이 해결하는 한필순은 호형호제하며 밤새워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한필순은 두 살 위였던 김성진을 평생 형이라 부르며 형제보다 더 신뢰했다. 한필순과 김성진은 가난한 나라에서 과학선진국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준 고국 대한민국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보답해야 한다는 국가관도 단단했다. 

훗날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김성진은 한필순의 국가관을 신뢰하며 그를 보듬고 기술자립 고비마다 힘이 돼 줬다. 한필순 역시 김성진의 청빈함과 솔선수범 실천, 공을 자신이 아닌 아랫사람에게 돌려주는 모습들을 지켜보며 같은 과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귀국 후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복귀한 한필순에게 다시 유학의 기회가 주어진다. 군인은 학식이 필요 없다며 반대하는 공사의 부장을 설득, 한필순은 공군 소령 신분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1969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공사를 거쳐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과 함께 초기 멤버로 입사한다. 과학자로서 역할이 본격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 시기 한 박사는 미국 대학의 조교수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자신의 꿈을 접는다. 그의 애국심, 국가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 자립적 연구개발의 시작
ADD에서 병참물자개발실장을 맡고 있던 한필순 박사. 연구원 10여 명이 전부였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기다.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쓰는 전쟁물자를 그대로 갖다 썼다. 그러나 미군과는 키, 체형이 달라 그들이 쓰는 무기는 무게도 크기도 부담이 됐다. 미군 철수가 지속 언급되며 정부는 ADD에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 등 기본화기 국산화를 지시했다. 암호명은 ‘번개사업’. 안된다는 이유를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해야 하는 연구개발이었다. 

한필순 박사는 수류탄 분과위를 맡았다. 쌀 한 가마에 7,500원 하던 당시 예산은 50만원이 전부였다. 한 박사는 내외부 연구진과 난상 토론 끝에 71년 여름, 한강에서 자갈 던지기 실험으로 수류탄 개발을 시작한다. 오후부터 시작한 자갈 던지기는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다. 연구진은 380그램(g) 자갈이 가장 멀리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어 380g 무게의 모의 수류탄을 기존 고구마형부터 손에 쥐기 쉬운 사과형 등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과형 380g 수류탄이 가장 멀리 나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형 수류탄의 탄생이다(이는 미군이 막 준비하던 모양의 수류탄이기도 했다). 

같은해 한필순 박사는 이스라엘제 방탄 헬멧 관련 3장짜리 팸플릿을 보게 된다. 방탄 헬멧, 한국군에게도 꼭 필요한 장비였다. 한필순 박사는 아내에게 20만원(한 박사의 월급이 4만원이었으니 개인에게는 작지 않은 금액이었다)을 빌려 방탄 헬멧 개발에 착수한다. 연구진과 밤샘을 밥 먹듯 했다. 하지만 모두들 불평 한마디 없었다. 연구진은 헬멧에 나일론 소재가 쓰인다는 것을 알고 나일론 천을 겹겹이 접착제로 붙였다. 그리고 실험에 들어갔다. 1m 30cm 위에서 쇠뭉치를 여덟 겹 나일론에 떨어뜨렸다. 나일론은 끄떡없었다. 한 박사는 방탄력이 철모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방탄 헬멧은 지프차, 육중한 트럭이 지나는 실험도 견뎠다. 한 박사 연구팀의 방탄 헬멧 개발 소식이 청와대에도 알려졌다. 오원철 대통령 경제2수석이 한 박사에게 방탄 헬멧과 망치를 가지고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한 박사는 오 수석과 청와대 뒤뜰로 갔다. 오 수석이 옆에 있던 건장한 체격의 경비에게 망치로 방탄 헬멧을 내리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대형 트럭에도 끄떡없던 방탄 헬멧이 힘없이 푹 꺼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힘이 빠졌다. 그러나 1분쯤 지나자 푹 꺼졌던 방탄 헬멧이 원래 모양대로 돌아왔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자주 국방의 기반 한국형 방탄 헬멧의 탄생이다. 방탄 헬멧은 의외로 불에 강하고 전도력도 높아 70년대 말 중동에 수백만 개가 수출되며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 

이어진 낙하산 개발 임무. 낙하산 개발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기본 지식도 데이터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주국방이 강조되던 시기로 못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한 박사는 1971년 4월 중순 과학잡지에서 1969년 7월 인류가 처음으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 우주선 관련 기사를 보게 된다. 그중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주선이 낙하산을 펼치고 태평양 상공에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한필순 박사는 우주선 관련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 속에서 낙하산 정보만을 발췌했다. 낙하산을 만드는 데는 무게, 공기투과도, 최적속도가 핵심 요소였다. 설계에 들어간지 5개월 만에 낙하산의 컴퓨터 설계를 마쳤다. 1971년 9월이다. 적은 예산으로 꼭 필요한 재료만 구입해 낙하산을 만들었다. 낙하산에 사람이 아닌 60kg의 모래주머니를 달아 실험에 들어갔다. 군용 수송기에서 내려보낸 낙하산은 목표 지점에 정확히 떨어졌다. 한국에 철강산업이 없던 시기로 낙하산에 필요한 금속 버클은 국산화하지 못했지만 낙하산 국산화의 기초를 마련한 계기다.

1973년 5월 ADD에 레이저 및 야시장비 연구실이 신설됐다. 실장은 한필순 박사가 임명됐다. 박사학위 시기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그였기에 레이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ADD 소장은 레이저실 예산 5,000만 원 중 4,800만 원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원자력연구소에 용역비로 주라고 지시했다. 한필순 박사는 소장의 지시대로 하지 않고 3,000만 원만 두 기관에 주고 나머지는 자체 연구개발비로 사용키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물리학 석사 후 유학 준비 중이었던 이종민 박사와 정기형 박사, 이건무 육군사관학교 물리학 교관을 연구원으로 위촉하고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그해 말 연구진은 탄산가스레이저를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국산 기술로 만든 최초의 레이저였다. 6~7m떨어진 철판에 레이저를 쏘면 철판이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자체 개발을 반대했던 ADD 소장도 성과를 인정하며 적극 지원에 나섰다. 국무총리와 대통령도 방문해 연구진에게 “수고했다. 진정 애국자네”라며 격려했다. 한필순 박사는 1973년 그간의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토대 마련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은 과학계에도 큰 회오리로 작용했다. 신군부는 미국을 의식해 자주국방의 중심축이었던 ADD를 대폭 축소했다. 인원의 절반을 내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장급은 소장에게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모두 반려됐다. 한필순 박사는 우수 인력이 떠날 것이라며 소장에게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전역할테니 그 자리에 공군 출신 연구자들이 승계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는 공사 입교 후 28년만인 1981년 1월 말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다.

그러나 한 박사는 이듬해 3월 16일 한국원자력연구소(당시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 바꿈, 외견상 원자력연 폐쇄) 부소장 겸 분소인 대덕공학센터분소장으로 임명된다. 한필순 박사의 원자력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구소 분위기는 암울했다. 폐쇄 소문과 대폭 삭감된 예산으로 연구소 시설과 환경은 열악했고 연구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연구실은 오후 5시만 되면 모두 퇴근해 불이 꺼졌다. 어쩌면 약소국으로 미국의 압력을 피하면서 한 분소장만이 침체된 원자력연 분위기를 되살리고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겠다는 윗선의 판단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분소장의 연구환경 개선 등 진심어린 노력으로 연구진은 조금씩 활력을 찾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연구개발이 아닌 국가적 필요로 구상된 중수로 핵연료 연구개발에 집중키로 한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연구진도 그의 진솔함에 이끌려 연구소에 남아 연구에 참여키로 했다.

한 분소장은 연구개발을 넘어 양산화 계획(연구개발, 시제품 제조, 검증, 품질보증, 양산)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연구자들은 연구개발까지만 원래 계획이라며 반발했다. 핵연료 품질보증과 양산까지 연구자들이 책임지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다. 한 분소장은 “과학자는 연구개발만 해서는 안 된다. 평소 품질보증까지 책임지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러분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기술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제부터 의식을 완전히 바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연구자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한 분소장은 “우리는 미국 과학자들보다 서너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기술을 따라잡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연구소는 오후 5시면 불이 꺼진다. 이래서야 어떻게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미국의 연구소들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라며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연구자들 모두 숙연해졌다. 한 분소장은 연구자들이 늦은 시간에도 퇴근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오후 8시 이후 한 시간 간격으로 세 차례 더 통근버스를 운영토록 했다. 그 시기 대덕연구단지는 대전시와 동떨어져 이동이 쉽지 않았다.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 예산은 연구가 시작된 1981년 개발비까지 포함하면 2년간 19억1000만 원이 투입됐다. 당시로서는 꽤 큰 사업이었다. 한 분소장은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진행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고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분야별로 책임자를 정했다.

중수로 핵연료 설계는 개발 책임 석호천 박사, 핵연료 성형·가공은 서경수 박사, 노심 관리는 김성년 박사, 노외(爐外)실증시험은 김병구 박사, 핵연료 변환은 장인순 박사, 품질관리는 이규암 박사, 사업종합조정은 남장수 정책실장이 각각 책임을 맡았다. 

연구진은 미국, 캐나다 등 국내외 유명 대학에서 원자력 분야를 전공한 젊은 연구원들로 실력 또한 쟁쟁했다. 이들은 일단 과제가 주어지자 눈에 불을 켜고 연구에 몰두했다. 밤샘도 밥 먹듯 했다. 오후 5시면 거의 모든 연구실에 불이 꺼져 적막감만 감돌던 연구소가 24시간 내내 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김병구 박사는 중수로 핵연료를 기어코 국산화하겠다며 82년 봄 어렵게 획득한 미국 시민권도 미련 없이 포기했다. 그의 부인 역시 남편의 확실한 결의에 주저하지 않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김 박사 내외의 결단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한 분소장에게 내내 안타까움을 남긴 연구자도 있다. 서경수 박사는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며 건강을 잃게 되면서 88년 유명을 달리한다. 원자력연 내에는 그를 기념하는 비가 마련돼 있다.

캐나다의 중수로 핵연료 개발에는 캐나다 달러로 10억 달러(원화 6000억 이상) 이상 투입됐다. 우리는 19억원 예산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국내 연구진은 캐나다에서 구입한 중수로 핵연료를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중수로 핵연료를 설계했다. 그러나 실물을 만드는 일은 더 어려웠다. 길이 1.5cm, 직경 1.2cm의 펠릿을 만드는 일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우라늄 가루를 1700℃나 되는 고온에서 8시간 구워 펠릿을 만들어내야 했다. 연구진은 수없는 실험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펠릿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또 있었다. 펠릿을 길이 50㎝, 직경 1.3㎝짜리 지르코늄 합금(zircaloy)으로 만든 막대 모양의 봉에다 채워 넣은 다음 양쪽 끝을 밀봉한 연료봉 37개를 모아 이를 한 다발로 묶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좌절하지 않았다. 1983년 1월 연구진은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마지막 관문은 성능시험. 1년간 원자로에서 연소시켜 열량이 제대로 나오면서 모양이 변하지 않는지 확인해야 했다. 국내에는 실험용 원자로가 없었다. 연구진은 캐나다 초크리버연구소에 있는 재료시험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정부는 우리나라 외환 사정이 좋지 않으니 무료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캐나다측은 시험로 건립비용이 고가이니 최소한의 실험비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수로 핵연료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캐나다와 연락을 취했어요. 그런데 너무 큰 금액(300만 달러)을 요구해 40만 달러로 겨우 확정하고 진행하기로 했어요. 정부에서는 이 돈도 많다며 무료로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낙담하고 귀국하려는데 캐나다에서 해준다는 연락이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1983년 3월 말 캐나다에서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 성능시험이 시작됐다. 결과는 열량, 모양 모두에서 우수했다.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핵연료가 국제적으로 공인 받게 됐다. 국산 기술을 어떻게 믿고 핵연료로 사용하냐며 반대했던 한전도 직접 발전소에 넣고 성능시험에 들어갔다. 1년 후 시험 결과는 캐나다에서와 마찬가지로 품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판정이 나왔다.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가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으며 한전, 정부의 지원도 두터워졌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한국형 원자로 개발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에너지 빈국 대한민국이 에너지 자립국으로 들어서는 첫 시발점이 됐다. 한 분소장은 1983년 7월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 1984년 4월 한국원자력연구소(당시 한국에너지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됐다. 서울과 대전에 흩어져 있던 원자력 연구인력 관련 부서는 대덕연구단지로 옮겼다. 에너지 기술자립 도약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공동설계’ 주도

한필순 소장이 3일간의 장고 끝에 내 놓은 경수로 핵연료 공동설계. 독일의 까베유사가 선정됐다.[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한필순 소장이 3일간의 장고 끝에 내 놓은 경수로 핵연료 공동설계. 독일의 까베유사가 선정됐다.[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1983년 한국에는 중수로 1기와 경수로 8기 등 9기의 원전이 있었다. 경수로 핵연료 개발이 당장 필요했다. 1983년 4월 원자력연 대덕공학센터를 극비 방문한 대통령 역시 “경수로 핵연료 개발이 시급하지 않나. 외국회사에 맡기지 말고 우리 과학자들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라며 개발을 주문했다. 5공 집권 초기 원자력연 폐쇄가 결정되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원자력은 이제 끝장난 게 아니냐”며 우려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겉으로는 원자력연 폐쇄를 명령했지만 원자력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어쩌면 약소국의 비애가 담긴 역사의 한 장면이겠다. 

그해 7월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한 한 소장은 업무 파악에 나선다. 기존 경수로 핵연료 개발 계획은 외국 자본을 50% 유치하고 설계도 외국에 맡기겠다는 안이었다. 한필순 소장은 기술자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기존 계획을 모두 백지화하고 핵연료 국산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 소장의 계획은 경수로 핵연료 설계와 관련 기술 도입선 결정은 한국의 과학자가 맡고, 비용도 국내에서 조달하는 안이었다. 8기의 경수로 원전에 핵연료를 공급하는 것으로 외국 자본이 투입되면 이후 경제적으로 손실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경수로 핵연료 기술 선정도 외국에 맡길 경우 꼭 필요한 기술이 빠질 수 있어 중수로 핵연료 개발 경험이 있는 과학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당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소련,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10개국 정도였다. 한전 이사회는 한 소장의 경수로 핵연료 개발 계획에 의구심을 가졌다. 이사회 내부에 반대 목소리가 많았지만 박정기 한전 사장의 강한 지지로 이사회는 마지못해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에 찬성을 표했다.

한 소장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이 이사회에 통과하자 겁이 났다. 한전은 1987년 말까지 이 사업을 끝내기로 사업 기간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불과 4년 5개월 안에 사업을 완료해야 했다. 한 소장은 1983년 7월 초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돼 중간에 이 사업을 맡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업 기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 한 소장에 의하면 국내 연구진들이 경수로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만 무려 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더욱이 그 무렵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한국의 연구진은 국내외를 망라해 고작 3~4명에 불과했다.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려면 무려 150명 가량의 핵연료 설계 인력이 필요했다. 또 이들을 일정기간 훈련시켜야 했다. 시간, 예산이 너무 부족했다. 훈련비도 150억원이나 예상됐다. 1인당 훈련비가 약 1억원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훈련비, 핵연료 설계비도 제대로 책정돼 있지 않았다. 시간, 인력, 예산 모두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한필순 소장은 이틀 동안 출근도 하지 않고 고민을 거듭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공동설계(joint design). 한 소장이 구상한 공동설계란 대략 이런 것이다. 핵연료 설계는 우리와 손잡을 외국회사와 우리 연구진이 각각 반반씩 수행한다. 단, 책임은 우리에게 설계기술을 제공해 줄 외국회사가 진다. 설계훈련은 설계과정에서 받기로 하고 별도의 훈련기간 없이 곧바로 설계에 들어간다. 어디까지나 공동설계이기 때문에 훈련비는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일하면서 배우자'는 안이다. 외국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어쩌면  억지 논리였다. 그래도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묘수가 없었다. 

공동설계 개념을 도입할 경우 일단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 소요되는 3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 없게 되고 설계 훈련비도 지불하지 않아도 돼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설계 인력을 반으로 줄일 수 있어 인력부담을 상당히 줄일 수 있는 묘안이었다. 한 박사는 임창생 대덕공학센터 핵연료개발부장에게 공동설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김시환 박사, 박종균 박사에게 연락했다. 이들은 미국의 원자력회사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에서 경수로 핵연료 설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해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한 소장은 두 사람에게 “한국에 와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두 사람은 “빠른 시간 내에 귀국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 박사는 더 좋은 여건을 뒤로하고 고국의 에너지 자립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연구자들을 ‘숨은 애국자들’이라고 평생 언급하며 고마워했다.

공동설계 안에 외국 회사들 모두 의아해했다. 한국에 방문해 한 소장의 설명을 들은 회사들은 황당해했다. 그러나 1984년 무렵 국제 원자력시장은 한국에 유리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사고로 선진 원자력 기술을 가진 나라들도 기술을 팔 데가 없어 판로 경쟁이 치열했다. 한 소장의 제안에 미국, 프랑스 모두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1984년 12월 공동설계 입찰에 3개국 5개 회사가 참여했다. '원자력의 원조' 로 불리우는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등 3개의 미국 회사와 독일 지멘스 그룹의 카베유사, 프랑스의 프라쥐마사 등이 서류를 냈다.
 
한필순 소장은 대덕공학센터와 핵연료주식회사에 속해 있는 40명의 연구자들로 평가단을 구성했다. 이들이 협력회사를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평가 기준은 기술이전, 기술 수준, 경제성이었다. 부족한 예산, 인력이지만 기술 이전으로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국산화하겠다는 의지였다. 평가단은 자료를 요구했고 회사들은 “한국이 기술을 몽땅 가져가려 한다”고 불평을 토로하면서 마지못해 자료를 내놨다.

밤샘 평가 끝에 1985년 8월초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우리 평가단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기술도입사로 독일 지멘스 그룹의 카베유사(社)를 선정했다. 원래 5개의 입찰회사 가운데 결선에 오른 회사는 카베유사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였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사가 제시한 입찰 조건은 카베유사보다 경제성, 기술이전 등에서 뒤졌다. 기술만큼은 웨스팅하우스사를 따라갈 회사가 없었다. '원자력 기술의 원조' 답게 정말 탐날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가단은 단지 기술 수준만 본 게 아니라 기술이전, 경제성 등도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그렇게 경수로 핵연료 공동설계 회사로 독일 카베유사가 선정됐다. 

웨스팅하우스사가 떨어지자 미국 측의 반발이 컸다. 전직 주한미 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소장은 기술 이전, 기술 수준, 경제성 세 분야에서 카베유사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며 원칙을 설명했다. 1985년 8월 앨런 세섬 미 국무부 핵감시국장도 한 소장을 만나러 왔다. 핵전문가 6명을 대동했다. 그들은 한국이 다른 목적(핵개발)이 있는지 의심했다. 원자력연에 국내 최고 엘리트들이 집결해 있는 것도 의아해 했다.

한 소장은 인간의 3대 욕구를 예로 들면서 그에게 한국의 원전 기술 개발 이유를 설명했다. 
“인간의 첫 번째 기본 욕구는 의식주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자유를 논할 수 있죠. 그런데 에너지는 의식주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컨대 밥을 지어 먹으려면 불이 있어야 하고 또 전기가 없으면 생활하기가 불편합니다. 이처럼 의식주와 에너지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입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와, 석탄도 저질탄 밖에 못 쓰는 실정이죠. 이런 상황이니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에너지 자원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에너지는 대한민국의 생존권과 관계된 것이고. 생존권이 걸려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3일간 감사 아닌 감사를 벌였다. 그러나 세섬 국장은 처음과 다른 눈빛으로 “한국이 평화적 목적으로 원자력 기술자립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전하겠다”며 한 소장을 격려했다. 실제 세섬 국장은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 대한 원자력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 까베우도 감동한 국내 연구자들의 노고
경수로핵연료 국산화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85년 8월 말. 독일 카베유사(社)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난 뒤부터였다. 계약 직후 한국의 연구진 30여 명이 독일 에어랑겐으로 떠났다. 

최소한 70여명의 핵연료 설계 인력이 필요했지만 당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30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소수 정예답게 이들의 실력은 쟁쟁했다. 국내 연구진 대부분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 출신들이라는 점이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연구진은 카베유사 기술진으로부터 핵연료 설계기술을 배우는데 몰두했다. 한국팀 중 3~4명을 제외하고는 핵연료를 설계한 경험이 없었다. 공동설계안은 배우면서 일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국내 연구진 대부분 난생처음 핵연료 설계를 해보는지라 작업 초기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언어와 관습의 장벽이었다. 

소통 문제도 있었다. 국내 연구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는 그런대로 잘했지만, 독일어는 매우 어설펐다. 쌍방이 영어로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다행히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원자력 분야인지라 그런 불편함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관습의 차이도 넘어야 할 난관이었다. 카베유사 기술진은 오후 5시만 되면 '칼처럼' 퇴근했다. 그러나 국내 연구진은 낮에 이들로부터 배운 핵연료 설계기술을 밤 늦게까지 복습하고 이를 토대로 실제 설계를 해야 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매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 퇴근도 잦아졌다.

그런데 당시 카베유사는 오후 8시부터는 출입문을 전자장치로 아예 통제했다. 출입문을 통해 나가려면 출입증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진은 그런 사정을 잘 몰라 출입문이 열리지 않으면 무조건 담장을 뛰어넘곤 했다. 나중에 회사 경비에게 들켜 번번이 주의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국내 연구진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단기간 내 핵연료 설계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익혔다. 독일 기술진들도 깜짝 놀랐다. 이들은 당시 한국 책임자인 김시환 경수로핵연료사업부장에게 “우리가 오히려 한국 과학기술자들에게 한 수 배워야겠다”며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국 연구진의 노력이 짐작된다. 

실제 국내 연구진들의 핵연료 설계 이론은 독일 기술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론 논쟁만 붙으면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못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쪽은 모두 이론에 강한 박사들인데 비해, 그들은 실무에 능한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내 연구진이 이론과 설계 경험을 갖추면서 그들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당초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은 87년 말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소장은 이번 기회에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사업 기간은 2년 더 연장됐다. 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돼 1989년 말 최초로 국산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국내 원자로에 첫 장전하는 쾌거를 거둔다. 연구진은 공동설계를 통해 이론, 설계, 생산까지 경험하며 기술개발의 자신감도 한층 높아졌다. 국내 원전에 사용되는 핵연료를 완전히 국산화하는데 성공 한 것이다.

◆ 대한민국 원전 기술자립을 위한 헌신과 기여
한 박사가 원자력연 소장으로 재임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기술은 한국형 경수로 개발이다. 한 소장은 핵연료 사장과 원자력연 소장을 동시에 맡고 있어 과기처가 주관하는 원자력위원회와 동력자원부가 주도하는 장기 원전 개발회의, 한전 산하기관들의 정기회의인 전력그룹협력회의에 모두 참석하게 됐다. 논의 주제는 한국 원전 11, 12호기인 영광 원전 3, 4호기에 설치될 원자로는 한국형으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1984년 8월 말, 한 소장은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원자로 계통설계(원자로 전체 체계에 관한 것으로 원자력의 핵심 기술)를 한국형 경수로로 해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간부진 대부분 핵연료 사업도 벅찬데 원자로 설계사업은 무리하고 지적했다. 인력도 절대 부족하다며 반대했다. 한 소장은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논의 끝에 원자력연이 원자로 계통설계를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부처 회의는 한전이 계통설계를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원자력연 인력 60명을 지원받아 한전이 원자로 계통설계를 하고 원자력연은 본체 설계만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결정됐다. 한 소장은 “원자로 계통설계는 실제 연구개발 능력이 되는 기관이 해야 한다. 원자력연 인력을 60명이나 빌려 한전이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결과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회는 다시 원자력연으로 넘어왔다. 1985년 봄까지 전력그룹 협력회의에서는 원자로 계통설계와 본체 설계를 분리하는 것은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사례이고 불가능하다며 논란이 지속됐다. 기술자립을 위한 연구인력의 중요성이 주요 쟁점으로 떠 올랐다. 그리고 그해 6월 25일 제4차 전력그룹 협력회의에서는 원자력연이 원자로 계통설계를 맡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원자로 계통설계는 8년간 약 1000억 원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원자력연이 출범한 이래 단일 사업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한 소장은 물론 원자력연 연구진도 모두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외국의 원자력 회사와 공동설계 방식으로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심사는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연구진이 맡기로 했다. 1986년 3월 말 3개국 4개 회사가 입찰에 응한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프랑스의 프라마톰, 캐나다 원자력공사다. 평가단은 6개월간 외국회사들이 제출한 입찰서를 검토했다. 이번에도 기술 우수성, 경제성, 기술전수 항목을 평가의 중요 요소로 놨다. 그 결과 미국의 컴버스천엔지니어링사가 선정됐다.

1986년 12월 14일 미국 윈저로 떠나기전 마련된 출정식. 가운데 필 설계기술 자립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1986년 12월 14일 미국 윈저로 떠나기전 마련된 출정식. 가운데 필 설계기술 자립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1986년 12월 14일, 원자력연에서는 특별한 출정식이 마련됐다. 원자로 계통설계 요원 1진 44명을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의 설계센터가 있는 미국 윈저(Windsor)로 파송하는 기념식이었다. 윈저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연구진은 그곳에서 3년간 파견 근무를 해야 했다.

한 소장은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우리가 기술 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기술식민지가 된다”면서 “기술 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 책임자인 김병구 박사를 세운 뒤  '필(必)설계기술자립'이라고 쓴 액자를 같이 들었다. 모두 비장한 각오로 “만세” 삼창을 외쳤다. 설계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생면부지의 땅 미국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가 가득했다.

연구진 대부분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과학자들이었다. 당시에는 훈련이나 연수 목적의 장기 해외여행이 규제받던 시절이었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 근무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시기에 가족과 같이 해외 파견을 가게 됐으니 모두가 긴장한 것도 사실이다. 인솔 책임은 이병령 박사가 맡았다. 

그런데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당초 계약과 달리 한국 연구진에 허드렛일만 맡겼다. 이병령 박사가 거듭 항의했지만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병령 박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에 철수를 통보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그제야 한국 연구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연구진은 밤낮을 두지 않고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익히는데 몰두했다. 연구진은 HOW 넘어 WHY까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같은 노력으로 3년 만에 한국형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3년간 연인원 200명의 한국 연구진이 이렇게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은 한 명의 이탈자 없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배워온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은 '원자력 기술자립과 원자력 강국 한국'의 토대가 됐다. 영광 원전 3, 4호기는 한국형 원자로로 준공됐다. 1996년 원전이 준공되고 한국은 1000MW급 가압경수로의 국산화율을 95%까지 달성하며 기술자립에 성공한다. 이는 어디에서도 같은 효율을 달성하는 원전 건설이 가능하다는 기술적 완성을 의미한다. 한국 표준형 원자로의 완성이다. 한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꼭 50년 만에 에너지 독립에도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한 소장과 연구진의 기술자립 열정, 헌신적인 노력은 원전 연구개발 선도의 발판이 됐다. 국내 연구진은 제3세대 신형 원자로 APR1400이나 일체형 소형 SMART 원전까지 개발한다. 한국은 원자력 기술 강국으로 우뚝 섰다. 

한 소장은 훗날 후배들과의 자리에서  “한국이 원전 기술 자립에 성공하기까지 연구진의 열정과 노력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이정오 과기처 장관, 이봉서 동자부 장관, 김성진 과기처 장관의 무조건 지원이 있었다. 대통령들의 암묵적 지원도 힘이 컸다”고 회고하며 정부의 과학기술 관심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기술 자립을 이루면서 원전기술 강국에 올라섰고 지금은 수출도 하고 있다. 과학기술 성과는 연구자를 신뢰하고 인정하는 정책 속에서 나올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당장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정책을 입안하거나 부처 이기주의에 연구자를 이용하고 희생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연구자는 국가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필순 소장은 1991년 2월 국내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최고 명예훈장인 ‘레지옹 드뇌르’를, 국내에서는 2010년 과학기술훈장 1급 창조장을 받았다. 그는 2015년 1월 25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군인 과학자로 시작, 국방과학기술과 원자력 기술자립에 혼신을 다했던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201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로도 선정됐다.

2016년 8월 ‘맨손의 과학자 한필순’ 출간기념식이 열렸다. 한 소장이 영면한 지 1년 6개월 만이다. 후배와 과학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했다. 

후배들이 이처럼 모일 수 있었던 데는 한 소장의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1995년 후배 신성철 박사(제16대 KAIST 총장)에게 전화해 한마디 한다. “신 박사, 로마클럽이라고 들어봤어?” 그해 4월 대덕연구단지 과학자들의 네트워크 커뮤니티가 탄생한다. 모임 명은 과학도시 대전에 위치한 대덕연구단지에서 따 온 ‘대덕클럽’. 항공, 우주, 생명, 전자, 원자력 등 각 분야 과학자들이 함께 한다. 1대 회장은 국내 우주 연구개발의 포문을 연 최순달 박사, 2, 3대 회장은 한 박사가 맡았다. 대덕클럽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대덕연구단지 과학자 커뮤니티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소장은 후배 과학자들에게 과학자의 역할을 늘 강조했다. 그는 “과학자는 골방에 머물지만 말고 연구성과가 국가, 더 나아가 사회와 지역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한 소장은 1991년 원자력연에서 은퇴 후 대전에서 환경기업으로 창업에 나서기도 했다. 언행일치의 실천이다. 

후배 과학자들은 한 소장을 끝없이 공부하며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혜안을 가진 리더로 평가한다. 에너지 자립과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위한 원전 연구개발 등 그의 평소 지론이 오늘날에 가장 중요한 이슈로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26일 한필순 소장은 한국원자력연구원 후배 과학자들에게 원자력 기술 자립 중요성 특강을 펼쳤다.[사진= 대덕넷DB]
2010년 1월 26일 한필순 소장은 한국원자력연구원 후배 과학자들에게 원자력 기술 자립 중요성 특강을 펼쳤다.[사진= 대덕넷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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