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산업 참리더 최 박사, 26일 발인
LG화학 기술연구원 떠나며 남긴 '고별사' 연구현장 회자
'월드 클래스 만들기' 15년 변치 않는 신념 하나로 연구소 운영
"연구소 권위주의 탈피하고 인재육성 힘써야···평가는 먼 훗날에"

한국 바이오산업 전설 최남석 박사가 24일 별세한 가운데 고인이 남긴 은퇴 고별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사진=대덕넷 DB]
한국 바이오산업 전설 최남석 박사가 24일 별세한 가운데 고인이 남긴 은퇴 고별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사진=대덕넷 DB, 디자인=심성훈]
한국 바이오산업 전설이자 후배들에게 참리더로 불린 최남석 박사가 24일 별세한 가운데 고인이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 기술연구원)를 은퇴하며 남긴 고별사가 과학기술계 연구현장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고별사는 LG임직원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계에게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보다 미래를 보는 경영', '국적 인종 등 차별 없이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오픈 연구소', '권위주의 탈피', '능력 본위로 운영되는 연구소'등은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월드클래스(World Class) 연구소를 만들기 위한 기본이 되며 후배들의 입을 타고 계속 전해지고 있다. 

고인은 석유화학중심이던 럭키중앙연구소가 신약개발과 전자재료 등 생명과학과 소재·정밀화학에 뛰어들 수 있는 씨앗을 심은 장본인이다. 소장 재임시절 한결같이 'Mr. What's new?'(새로운 것 없나?)라 인사를 하며 남들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도록 연구원들을 자극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고인은 자서전 제목 '비행기에는 백미러가 없다'처럼 10년 후 살길을 개척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생각했다. 연구소를 월드 클래스로 만들기 위한 신념 하나로 연구소에 몸을 담았다. 고인의 그동안의 경영철학을 담은 고별사를 되짚어본다.

◆ 오로지 월드클래스 추구, 기업 연구소 넘어 韓 바이오 영향 끼치다

"어떻게 하면 우리 연구소를 월드클래스로 만들까. 15년 동안 변하지 않는 신념 하나로 연구소를 운영했다. 비행기 운전석에는 백미러가 없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면 된다. 평가는 먼 훗날에 받으면 될 것이다." [고별사 중에서]
 
고인의 고별사에는 몇 번이고 월드클래스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의 사명이기도 했던 월드클래스 연구소는 세계 수준의 연구 하드웨어를 갖추고, 세계 수준의 연구 인력들이 모여, 세계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는 곳이다. 항상 미래지향적 사고로 연구소를 운영하려 노력한 그에게 월드클래스는 연구소 운영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그의 15년 신념이었다.

인재가 만사라 했던가. 고인은 월드클래스 첫 걸음에 '인재'를 강조했다. 기업연구소지만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고 키우기 위한 노력을 15년 동안 아끼지 않았다. '연구인력 고도화정책'을 통해 연구원을 일반 임원과 동등하게 대우하되 연구에 전념하도록 관리 업무를 배제해주는 '연구위원 직제'를 시도했고, 석사 연구원의 해외 박사학위 취득 지원제도 실행 등 인구인력 고도화정책을 강력 추진했다. LG화학 기술연구원의 핵심인물로 활약한 유진녕 원장과 고종성 제노스코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고인은 LG를 떠나면서도 인재육성에 LG가 끝까지 관심가져주길 바랐다. 그는 "우선 세계 수준의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연구인력 고도화 정책(유학 특혜 시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한다"며 "앞으로는 외국 연구 인력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할 것이다. 특기와 실력이 있는 연구원이면, 국적, 인종, 성의 차별 없이 누구나가 일할 수 있는 오픈된 연구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연구의 최대 적인 권위주위를 탈피해야한다고도 강조했다. 연구소는 무엇보다 능력에 따라 운영돼야하며, 연구원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 실행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의 최대 적이라 할 수 있는 권위주의가 팽배한 조직, 상사에게 의존하는 조직, 권한은 없고 책임만 많은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능력에 따른 평가와 보상이 공정하게 주어지도록 조직이 운영되어야만 한다"며 "결국은 능력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가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능력 위주의 평가를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더 능력 위주의 인사 정책을 펴 나가달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는 연구원들의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지 않는다면 어떠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세계인이며, 내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연구에 전념해 주기를 부탁한다"며 "우리가 World Class의 연구소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바로 여러분이 있기 때문이다. 긍지를 가지고 일해 달라. 여러분이야말로 대한민국 제1의 과학자요, 엔지니어다"라고 후배들을 격려했다. 

최 박사는 영면했지만 그의 후배들은 대한민국 바이오계를 이끌며 그의 가르침을 대물림하고 있다. 국내 신약개발 1세대로 꼽히는 조중명 크리스탈지노믹스 대표, 김용주 레고켐바이오 대표, 박순재 알테오젠 대표 등 30여 명이 LG를 떠나 바이오벤처를 설립했다. 이 외에도 의약품 유통, 임상시험, 벤처캐피털, 경영으로 진출한 이들도 있다.

그의 후배인 김용주 대표는 추도문을 통해 "갑작스런 타계소식에 우리 모두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는 최박사님을 영원한 보스라고 부른다. 당신께서 주신 크나큰 가르침은 저희들 속에 깊이 각인돼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최 박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생각하게 된다. 최박사님은 떠나시지만 우리 속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부디 영면하십시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별사(告別辭)

친애하는 연구원 여러분! 오늘 발표를 통해 여러분들께서도 아셨겠지만 본인은 금년 말을 기하여 정년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1월 1일부터는 그동안 고분자연구소를 맡아 운영해 오신 여종기 소장께서 부사장으로 승진하시어 기술연구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CU의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 분야의 연구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왔으며, 앞으로도 기술연구원을 훌륭히 이끌어 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여러분들께서도 신임 여종기 원장을 성심껏 도와주시고 새로운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곳에 몸담은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습니다.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만, 한국의 빠른 R&D 환경의 변화를 생각할 때 그동안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1979년에 기업 연구소로는 처음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입주하여 50여 명의 연구 인력으로 시작한 이래 중앙연구소로서의 기틀을 잡았으며, 전문연구소 위주의 연구개발 본부 체제를 거쳐, 지금처럼 650명에 이르는 연구 인력이 종사하고 있는 기술연구원 체제로 성장하기까지 우리의 연구개발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고 믿습니다.

원래 저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몇 년 전 신년사에서 말했듯이, 비행기 운전석에는 백 미러(back mirror)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제 성격에 맞지 않을 뿐더러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기에도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항상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면 될 것이고, 평가는 먼 훗날에 받으면 될 것입니다.

15년 동안 저는 변하지 않는 신념 하나로 이 연구소를 운영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 연구소를 월드 클래스(World Class)의 연구소로 만들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 왔고 항상 미래지향적 사고로 이 연구소를 이끌어 가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낸 이곳에서 생활한 것에 대해서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저의 재임 기간 중 의도하지 않은 일로 피해를 입었던 분이 계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달 이맘때쯤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 출장 기간 내내 저는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내에 우리 연구소가 'World Class' 연구소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해 골몰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CU에서는 2000년에 세계 30대 화학회사로 발전하고, 창사 100주년이 되는 2047년에는 세계 10대 화학회사로 진입하겠다는 야심 찬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계획이 현재의 사업만 가지고는 달성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업 영역의 재조정 없이는 발전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요, 또 하나는 R&D 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 모두가 Globalization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중 혹시 전략적 제휴는 비즈니스 측면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략적 제휴의 핵심은 그 기업의 기술 수준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기업의 기술 수준에 대한 명확한 평가 없이는 제휴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업의 기술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정보의 원활한 제공과 획득, 그리고 평가입니다. 요즈음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든지, 정보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든지, 인공위성을 띄운다든지 하는 것 모두가 어떻게든 필요한 정보를 남보다 빨리 얻고자 함입니다. 이제 PC 없는 연구 생활이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어루만지는 식의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보의 습득이란 마치 우리 몸의 오감과 같은 것이어서, 보고 듣고 하는 기능이 제대로 돌아갈 때 건강하듯이 정보의 획득, 유통이 원활할 때 연구개발이나 사업의 제반 문제들이 잘 수행될 수 있습니다.

비전 달성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인 R&D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우선 우리 R&D가 세계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전략적 제휴나 아웃소싱 추세는 연구개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연구개발 측면에서 이를 선도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따라서 이러한 추세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 자신이 세계 수준의 연구소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협력과 제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World Class Research Institute'란 어떤 연구소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나름대로는 세계 수준의 연구 하드웨어를 갖추고, 세계 수준의 연구 인력들이 모여, 세계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는 곳이 'World Class'라고 생각합니다. 동부단지의 건설로 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연구소가 건립되었고, 여기에 걸맞은 기기들도 속속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연구 인력을 어떻게 하면 세계 수준으로 확보하고 육성할 것인가 하는 점과, 어떻게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가 창출될 수 있도록 연구소를 운영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세계 수준의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연구인력 고도화 정책(유학 특혜 시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며, 앞으로는 외국 연구 인력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기와 실력이 있는 연구원이면, 국적, 인종, 성의 차별 없이 누구나가 일할 수 있는 오픈된 연구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례로 지금 현재의 연립주택을 개조하여 외인 숙소로 만들려는 계획도 추진 중에 있습니다. 'Internal Globalization(내부의 세계화)'이 되어야만 세계를 무대로 당당히 경쟁을 하고 전략적 제휴를 할 수 있는 연구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연구소 운영과 관련된 점입니다. 연구소는 무엇보다도 능력 본위로 운영되어야 하며, 연구원이 스스로 자기의 일을 찾아서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구의 최대 적이라 할 수 있는 권위주의가 팽배한 조직, 상사에게 의존하는 조직, 권한은 없고 책임만 많은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능력에 따른 평가와 보상이 공정하게 주어지도록 조직이 운영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결국은 능력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가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능력 위주의 평가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앞으로 더 능력 위주의 인사 정책을 펴 나가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 모이신 여러분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지 않는다면 어떠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세계인이며, 내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연구에 전념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1995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이면 여러분들이 느끼시는 감회도 각자 다르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로서는 금년 한 해가 유난히도 저의 기억에 남는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15년을 몸담고 있던 이 연구소를 퇴직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World Class의 연구소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는 것도 바로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긍지를 가지고 일하십시오. 여러분이야말로 대한민국 제1의 과학자요, 엔지니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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