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 철수 검토 등 최악 상황에 미 8군 사령관 부임
두 달여만에 서울 재수복, 지피지기 적용의 모범 사례, 전략 수립 교과서
직접 비행기로 적진 정찰, 현장 확인···'왜 싸우는가?' 설명하며 아군 동기부여
6.25 75주년 맞아 되돌아 보는 戰史···중국 과학굴기 대응 시사점
리지웨이 장군의 지피지기 전략은 중국의 과학굴기를 맞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절망적 상황에서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대응이 어떻게 판세를 뒤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 최악 전황에 한국 전장 투입된 미 육군 에이스
매튜 리지웨이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검증된 명장이었다. 82공수사단 지휘관으로 시칠리아, 이탈리아, 노르망디 작전에 참여했고, 1944년 8월에는 XVIII 공수군단을 지휘하여 벌지 전투, 바시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리지웨이의 지휘능력은 탁월했다. 적진 깊숙이 투입되어 고립된 상황에서도 부대의 사기를 유지하며 임무를 완수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이런 경험은 후에 한국 전장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50년 12월 23일,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한국 전선에는 새로운 지휘관이 필요했다. 당시 미국 본토에서 육군 부참모총장으로 근무하던 리지웨이에게 한국행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즉시 태평양을 건너 1950년 12월 26일 한국에 도착했다.
리지웨이가 부임한 시점의 한국 전선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유엔군은 연이은 패전을 거듭하며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부임 며칠 뒤인 51년 1월 4일 서울은 재점령당했다. 전선은 계속 밀려 안성-평택-이천-삼척선까지 밀려있었다.
중공군의 파죽지세는 상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엔군의 정보 실수가 결정적이었다. 중국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참전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38선을 넘고, 평양 이북의 청천강을 넘으면 레드라인을 넘는다고 외신과의 회견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취해 많은 정보를 무시했다. 그러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에 닿은 시기에 즈음해 전격적으로 교전에 들어갔다.
이런 배경에서 리지웨이가 부임했을 때 한국 전선 상황은 최악이었다. 중공군의 3차 공세로 서울이 함락되고 유엔군이 한강 이남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워싱턴에서는 심지어 한반도 전면 철수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합참은 부산 교두보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의 사기였다. 연이은 패전으로 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일부 부대에서는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후방으로 물러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대한 공포감이 유엔군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 지피지기 전략의 실천 - 적을 정확히 알라
리지웨이는 부임 직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상황 파악이었다. 그는 직접 경비행기를 타고 전선을 순찰하며 중국군의 실상을 파악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최고 지휘관이 직접 현장을 확인함으로써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원까지 거슬러 올라간 공중 정찰을 통해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한계를 발견했다. 중국군은 보급선이 취약하고, 특히 공군력이 부족해 주간 작전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또한 중국군의 공세가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는 것도 알아냈다. 중국군은 대규모 공세를 펼친 후 보급과 재정비를 위해 일주일 단위 전후로 공세를 멈추는 특징이 있었다.
특히 수원까지 정찰한 결과 중공군의 대규모 주둔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취하게 된 조치가 위력정찰이다. 척후병 몇 명을 파견해 적황을 탐지하는 정찰 방식이 아니라 중화기가 동원된 정찰이다.
◇ 지평리 전투 - 위력정찰의 교과서적 사례
한국전쟁사에서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에서 '위력정찰'이 결정적 전술이었다. 단순한 정보 수집을 넘어서 실제 전투를 통해 적의 실상을 파악하는 공격적 정찰 작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절망적인 전황을 역전시켰다.
위력정찰은 상당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실제로 적을 공격하면서, 적의 반응과 대응 능력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영어 표현인 'Reconnaissance in Force'가 잘 보여주듯이, 이는 '힘을 가한 정찰', 즉 무력을 사용하여 적의 실체를 드러내는 작전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를 눌러보며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처럼, 군 지휘관이 적을 실제로 때려보며 그들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다.
위력정찰이 일반 정찰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적이 자신의 실력을 숨길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몰래 지켜보는 정찰에서는 적이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흘리거나 실제 전력을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공격을 받으면 적은 어쩔 수 없이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는 위력정찰의 교과서적 사례가 되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경기도 양평군의 작은 마을 지평리에 미 제2사단 23연대를 배치했다. 유엔군이 자리한 안성에서 북으로 70km를 적진 속으로 들어간 모험이었다. 무모한 전진 배치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위력정찰 작전이었다.
리지웨이는 지평리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중공군이 반드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 중공군 입장에서는 유엔군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 자신들의 전선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중공군은 지평리의 유엔군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리지웨이가 노린 것이었다. 중공군이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평리에서의 3일간 격전을 통해 리지웨이는 중공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그들의 한계였다. 초기 공격력은 강했지만 지속적인 전투 능력유지는 어려웠다. 보급선 취약성이 확인된 것. 또 중공군은 주로 야간에 공격했는데, 이는 유엔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때문에 주간 활동이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인해전술이 생각만큼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적절한 방어 진지와 화력 지원이 있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평리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유엔군이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이 그 증거였다.
◇ 지기(知己) - 아군에 대한 정확한 파악
리지웨이는 적 못지않게 아군의 상황 파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전선의 주요 지휘관들과 개별 면담을 실시하며 부대 상황을 점검했다. 특히 일선 장병들과 직접 대화하며 사기 상태와 전투 의지를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리지웨이는 "왜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한국 전쟁의 의미와 목적을 장병들에게 설명하며 동기를 부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분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또한 리지웨이는 유엔군의 장점을 재발견했다. 화력의 우세, 공군력의 압도적 우위, 그리고 무엇보다 각국 군대의 전문성과 경험을 조합하면 중공군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 전황 역전과 서울 재수복
지평리 위력정찰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선 유엔군 사기가 크게 회복되었다. 적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낸 경험은 장병들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전술적으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공군의 약점을 파악한 리지웨이는 이를 활용한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주간 활동을 피한다는 점을 이용해 공군력을 최대한 활용했고,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951년 3월 7일, 리지웨이가 지휘하는 유엔군은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을 개시했다. 이는 서울 재수복을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였다. 지평리에서 보여준 적의 한계를 충분히 활용한 작전이었다.
3월 14일, 드디어 서울이 재수복되었다. 이는 리지웨이가 부임한 지 불과 2개월 반 만에 이룬 성과였다. 중공군 개입으로 절망적이었던 전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후 유엔군은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했다. 4월 말에는 38도선을 회복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도 했다. 1951년 4월 11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면서 리지웨이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지휘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 현재적 교훈 - 중국 과학굴기 대응 전략
리지웨이 장군의 사례는 오늘날 중국의 과학굴기에 대응하는 전략 수립에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리지웨이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며 적의 실상을 파악했듯이, 우리도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 수준을 정확히 평가해야 한다. 감정적 접근이나 과도한 낙관론, 혹은 극단적 비관론은 모두 금물이다. 중국의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의 한계와 취약점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 전략 수립의 출발점이다.
리지웨이가 위력정찰을 통해 중국군의 실체를 확인했듯이, 우리도 중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실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단순한 통계나 발표 자료가 아니라, 실제 성과와 응용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리지웨이가 유엔군의 화력 우세와 공군력을 재발견했듯이, 우리도 중국과의 과학기술 경쟁에서 우리만의 강점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정보통신기술, 반도체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창의성과 혁신 능력은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서방 선진국과의 협력체계는 중국이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우리의 자산이다.
리지웨이가 "왜 싸우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했듯이, 우리도 과학기술 발전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히 중국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와 번영에 기여한다는 더 큰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국민과 연구자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과학기술 발전이야말로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과제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리지웨이가 무리한 북진보다는 확실한 방어선 구축에 집중했듯이, 우리도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 경쟁하려 하기보다는 우리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확실한 성과를 거두고, 이를 바탕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이 중요하다. 리지웨이가 보여준 것처럼, 정확한 현실 인식과 우리 역량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바탕으로 한 전략만이 장기적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
리지웨이 장군의 지피지기 전략은 단순한 군사 전술을 넘어서 모든 경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다. 75년 전 절망적 전황을 역전시킨 그의 지혜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에도 여전히 유효한 해답이 아닐까.
◇지평리 전투 기념관
지평리전투에서는 미군 제23연대와 함께 프랑스 대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프랑스의 몽클레르 대령이다. 그는 원래 장성 계급이었지만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부대 규모에 맞게 스스로 계급을 낮춰 참전했다. 이러한 그의 희생정신과 함께 전투에서 보여준 혁혁한 공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미국과 프랑스 장병들의 희생을 기리는 각종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이들 기념비는 단순한 추모의 의미를 넘어서 한국전쟁 당시 국제사회의 연대와 우정,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평리전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전투였다.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며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이 전투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한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기념관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현장 학습지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방문 안내
주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
전화번호: 031-771-6625
개관시간: 오전 10시 ~ 오후 5시 40분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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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봉 기자 happymate@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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