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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3이 되니 공부 좀 해야겠다는 학생들이 부쩍 늘 때. 토요일 오후에도 도서관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고 꽤 비장한 분위기가 흐를 정도. 그날도 도서관에서 오전을 뿌듯하게 보내고, 친구들과 점심을 하러 학교 앞 중국집에 둘러앉았다. 모두 짜장면 곱빼기를 주문한 것 같다. 힘 좋게 비비고 먹기 시작하는데 한 친구가 눈짓을 한다. 옆 테이블에 앉은 어른들이 탕수육 포함,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켜 놓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왜?""우린 언제 저런 것 먹어 보냐?”"고등학교 졸업 40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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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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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한 해가 아니었다. 그저 코로나 해다. 코로나가 왕중왕. 개인도 국가도 경제도 정치도 코로나와 잘 지낼 수 없을까 연애 편지만 썼다. 주소도 모르면서 써 댔다.시간의 흐름도 코로나 앞에서 바뀌었다. 공간의 개념이 낯설어졌다. 시간 흐름은 조금만 변해도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뒤뚱댄다. 째깍, 째깍, 째애깍, 째애깍깍, 제멋대로 가는 시계들! 어찌 될 것인가. 같은 시간을 쓰는 것은 인터넷뿐이다.그림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계가 없다. 시계는 보는 사람이 가지고 간다. 선택한다. 상상의 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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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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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다. 박사학위를 한 제자가 주례를 서 달란다. 진땀 나게 사양했는데, 주례 선생님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어울리지 않는 좋은 이야기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하다.첫 번째 주례는 대방동에 있는 공군 본부 강당 같은 곳에서 했다. 40대 초반이었는데, 개구쟁이 제자에게는 내가 꽤 나이 있어 보인 모양이다. 주례를 하러 단상에 서 있는데 왜 그리 떨리는지. 박사 학위 논문 심사받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첫 번째 국제 학술대회 발표 때도 없었던, 전신 오한 비슷한 증세가 괴로웠다. 그런데 반전의 기적이 찾아왔다. 신랑 신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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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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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힐 해돋이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천근 같아지팡이로 밀어제친 언덕길이수만리 같았지만그 신비의 모습을 보러새벽같이 어둠과 함께 올라간 곳그곳엔 산도 하늘도 하나의 어둠그러나 헐떡거리는 숨 헤치고저편 아득히 먼 곳에서빛나기 시작한 조그만 붉은 오늘활활 불덩이가 되어8100미터가 넘는 다울라기리를 번쩍 일으켜 세우고위풍당당한 안나푸르나를 어둠 속에서 걷어낸다.아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사진기를 눌러대고얼굴이 또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어 빛난다.그 불빛이날 어둠 속에서 번쩍 일으켜 세우고불편했던 어둠을 걷어 내주는구나.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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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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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 숙제 중의 하나가 그림일기였다. A4 용지 두 배쯤 되는 스케치북에 2/3 정도는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몇 자 적는 형식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써서 내면 상을 주었다. 교장 선생님이 주는 상을 운동장에 가득 모인 친구들 앞에서 받은 기억도 있다. 교장 선생님은 높은 단상에 계시고 선생님들이 뒤에 쭈욱 서 계시던 시절이다. 단상까지 두근두근 걸어 나가는데 뛰어가라 해서 놀라기도 했다. 1학년 때는 주로 "수박을 먹었습니다" 하고 큰 수박을 그리는 정도! 조금씩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박은 작아졌다. 아버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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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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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그러니까 2018년 4월 중순이었나? 큰맘 먹고 파리에 한 열흘 머문 적이 있다. 코로나 발발 2년 전이었으니 운이 좋았다 할까? 파리 호텔 값은 우리 호주머니와 여행목적엔 턱없어서, 거주 공간 공유 시스템을 이용하였다. 개인 소유의 공간을 빌리는 것이라 약간은 모험이지만 여행에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도 해 좋은 면도 있다.노트르담 성당 근처 중심가에 우리 부부가 한 열흘 잘 머물 곳을 찾았다. 노트르담 성당이 2019년 4월 15일 저녁 화재로 참담한 모습이 되었으니 묘한 기분이다. 주위에 식당도 많고 조그만 식료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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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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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40년 전이다. 햇병아리 조교수 시절에 가게 된 암스테르담은 낯설고, 화려하고, 복잡하고,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었다. 박사 학위 시절 썼던 논문에 관심을 가진 학술대회 임원 중 한 분이 논문 발표를 권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미국 병이 채 치료되지 않은 시절이라 서울, 대전에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낯설고 때로는 신경질도 났었던 것 같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일할 곳도 찾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던 차에 해외 학회 참가는 행복한 탈출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여비에 어울리는 암스테르담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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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1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