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양한 KAIST 명예교수

여름 방학 숙제 중의 하나가 그림일기였다. A4 용지 두 배쯤 되는 스케치북에 2/3 정도는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몇 자 적는 형식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써서 내면 상을 주었다. 교장 선생님이 주는 상을 운동장에 가득 모인 친구들 앞에서 받은 기억도 있다. 교장 선생님은 높은 단상에 계시고 선생님들이 뒤에 쭈욱 서 계시던 시절이다. 단상까지 두근두근 걸어 나가는데 뛰어가라 해서 놀라기도 했다. 1학년 때는 주로 "수박을 먹었습니다" 하고 큰 수박을 그리는 정도! 조금씩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박은 작아졌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나 이렇게 둘러앉은 모습 속에 수박이 조그맣게 푸른 사과처럼 가운데 있다.

한 10년 전인가? 대학원생들이 집에 와서 저녁을 함께 했다. 식사 후 달리 할 일이 없던 차에 누군가가 논문 쓰는 이야기를 하였다. 어렵다는 이야기, 왜 써야 하나, 많이 써야 장땡인가, 좋은 논문 1편이면 되는 것 아닌가, 등등. 끼어들면 잔소리 꼰대 될 것 같아 참고 있었는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났다. 벽장 구석에서 수박 그림일기책이 대화에 끼었다.

"신기하지? 이 그림일기!"

"와!"

갑질왕의 어렸을 적 모습을 잠시 보는 기분에 모두 들떠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부성 발언이 주종을 이루었고.

"아마, 이 그림일기와 논문은 비슷할 것 같은데? 그림도 있고 또 문장도 있고."

"------"

말이 없다. 대학원생들은 써늘한 바람이 되어 집을 빠져나갔다.

실수했나?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자랑이 몸에 배었다는 집사람 이야기가 생각났다. 반성하고 바꾸기엔 너무 늦었나?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온 식구가 함께 그림일기를 썼다. 아버님은 특별히 적극적이었다. 그림일기 군데군데 어른 냄새가 났다. 선생님도 아시는 듯, 웃기만 하셨다. 가족 그림일기가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그림일기는 아버님의 세 가지 명령? 중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입학식 저녁에 말씀하셨다.

"이제 학생이 되었으니 좀 생활이 바뀌어야지?"

"네!"

"세 가지만 지키면 좋을 것 같다!"

"세 가지씩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기 전에 그날 배울 것 큰 소리로 읽어라. 학교 갔다 오면 숙제해 놓고 친구들과 놀고, 자기 전에 일기를 쓰면 내 잔소리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것은 거의 불가능해서 자주 어겼다. 아침 책 읽기는 소리가 들리니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자기 전에 일기 쓰는 것은 버릇이 되었다. 꿈나라 가는 버스표 같은 것이었나?

버릇은 대단하다. 요새도 가끔 일기를 쓰게 한다. 대학교 때 쓴 일기는 좀 특별했다. 집사람과 사이를 따뜻하게도 냉랭하게도 한다. 난 첫사랑이라 하였는데 일기는 다른 이야기를 하여서 문제가 된다. 유학 가기 전, 내 일기는 집사람의 소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과가 좋아 후회는 없지만 가끔 후회도 한다.

일기는 두뇌와 손가락 사이 통신 방법. 무엇인가를 쓰면 두뇌가 이야기한다. 뇌와 손은 연결되어 있다. 생각을 먹음직한 요리로 바꾸어 놓는다.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요리가 좋아지는 특성이 있다. 많이 써야 좋은 글, 논문을 쓸 수 있는데 학생들은 논문 쓸 때가 되어야 좋은 논문 쓰는 법 같은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릴 대상을 발견한 후에 스케치를 시작하는 것은 같지만, 그때부터 스케치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연애 편지로 득을 크게 본 사람의 글쓰기 예찬론이다.
 

[삽화=진 강일 2010. 10]
[삽화=진 강일 2010. 10]
논문 쓰는 것은 대학교수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글쓰기, 강의, 연구가 밥줄이다. 특히 많은 수의 논문을 요구하는 학교∙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교수는 버릇처럼 써야 한다. 논문의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교수가 많은 이유다. 그저 써 댔으니 기억이 없다. 묵혀진 생각의 단지에서 나온 장맛이 없다. 맛이 없으니 읽는 사람 또한 적다. 어떤 주제를 생각하면 이리저리 생각하여야 모양이 나온다. 입체적 모습이 보일 때까지 멀리 또 가까이 보아야 한다. 남이 한 연구의 조각들을 맞추어 새 그림이라 주장하거나 빈 그림 조각을 찾아내 쓰는 그림은 속도전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남이 곧 한다. 깊은 맛이 없다.

그렇다고 좋은 논문 쓰는 구상만 하고 있으면 논문이 나오지 않는다. 까치집 짓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일단 집을 지어 보아야 다른 높은 나무에 집을 지을 수 있다. 집 짓는 연습을 많이 하여야 한다. 화가의 스케치처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어서는 곤란하다. 나중에 창피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초등학교 수박 그림일기가 세월이 흐르면 친구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그리고 내 이야기로 변해간다. 수박 이야기가 사람 이야기, 세상 이야기가 된다. 사람, 세상을 수박처럼 상위에 놓고 보고 먹고 나눈다. 

화가들은 생각 항아리에 생각을 묵히고 좋은 곰팡이가 잘 번식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좋은 균을 만드는 메주를 수없이 만드는 수고를 수고라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 바꾸어 그리는 것은 모두 새로운 메주를 만들기 위한 준비이다. 

모네는 건초더미를 수없이 그렸다. 건초더미는 그림일기의 수박이고 메주인 셈이다. 논문의 건초더미와 수박을 찾으면 유명해지는 길을 절반은 온 셈이다. 누가 물었다. 자랑스러운 논문이 몇 편이냐고. 검색을 해보니 수백 회 이상 인용된 논문이 꽤 있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논문, 혹은 분야는 두 개였다. 아니 두 개나 되었다. 큰 수박이 두 개 내 인생의 밭에서 자란 셈이다.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면 건초더미가 빛이 되기도 하고 그늘이 되기도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되기도 한다. 모네는 건초더미 연작 25점을 지베르니의 집에서 그렸다. 2019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1300억원에 낙찰되었다. 노벨상 받은 논문 정도 되는가? 

25점의 건초더미 그림은 세계적인 미술관들에 걸려 있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건초더미 그림, 'end of summer, 늦여름'은 더운 여름 날씨에 땀 흘리며 서 있는 덩치 큰 아주머니 모습이다. 시카고 미술관에서는 여러 개의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어 좋다 한다. 

'end of summer, 늦여름'은 시카고 미술관에 있다. 아주머니가 땀에서 해방되어 있다. 모네는 건초더미에서 빛이 그리는 계절의 변화, 그리고 세상을 그렸다. 건초더미가 세상을 이야기한다. 쇠라의 점묘법 점들이 어깨동무하고 세상을 표현한 것을 빛의 화가 모네는 건초더미 25개를 빛으로 익혀 세상에 맛보게 하였다. 건초더미는 모네의 수박이다.
 

건초더미 Stacks of Wheat (End of Summer). [사진=시카고미술관]
건초더미 Stacks of Wheat (End of Summer). [사진=시카고미술관]
건초더미 못지않게 유명한 모네의 연작이 있다. 포플러 나무 연작, 25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베르니에 일본식 정원을 꾸미고 있었던 그에게 이 연작들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파리의 화상들은 이 연작들을 화랑에 내 걸고 좋은 값을 받고 파는데 성공하였다. 테마를 잡고 판을 벌여 성공한 것이다. 

포플러 나무는 우연히 그려졌다. 모네는 지베르니 위에 있는 에프트라는 강에 보트를 매어 두곤 산책을 하였는데 그 근처 공유지가 경매에 부쳐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하던 포플러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것을 아쉬워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이 그림들이 파리에서 대박을 칠 줄이야! 연구도 이렇게 우연히 최선을 다하면 꽤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정현종의 시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포플러 나무 이후 르왕 대성당 연작으로 모네는 빛을 그리는 방법을 완성하였다. 약 2년에 걸쳐 그렸다던가? 성당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세 군데에서 그렸다 한다. 이 연작을 통해 빛은 철저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네는 건초더미, 포플러, 르왕 대성당을 통하여 빛을 공부했다. 빛은 이야기로 변하였다.

모네의 그림일기 속 수박은 끊임없는 연습을 통하여 논문으로 변하였다? 어떤 논문의 주제는 빨리 연구비를 준다. 화상이 때맞추어 전시한 것이 돈이 되는 원리와 같다. 좋은 주제로 쓴 논문이 높은 평판의 논문집, 편집인을 만나는 경우다.

권위 있는 학회에 초보가 가면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대가가 발표할 논문을 호텔에서 열심히 미리 공부하고 질문을 메모지에 적어서 간다. 발표장 맨 앞줄에 앉아있다 손을 든다. 얼굴이 버얼개져 질문한다. 이렇게 교류를 튼다. 

이제는 시간문제다. 실력만 있으면 알려지기 시작한다. 내 논문 발표에도 사람이 온다. 발표를 잘해야 한다. 준비한 작품이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밤새 호텔 화장실에서 연습한다. 발표자료를 몽땅 외운 다음 한 스무 번 화장실에서 연습한 기억이 추억이다. 화장실에서 하면 울린다. 이 울림을 학회장에서 얻고 싶은 것이다.

시장을 여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하지만 운이 왔을 때 팔 준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행에 맞추어 논문을 쓰면 다 쓴 다음에 시장은 딴 상품을 팔고 있다. 모네의 연작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연작을 할 것인가? 건초더미나 르왕 대 성당을 특별히 선택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모네가 그들을 유명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건초더미가 유명하지는 않았다. 르왕 성당도 그림의 대상으로 유명하지는 않았다.

연작으로 유명한 화가에서 세잔을 빼놓을 수 없다. 법률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자가 된 세잔은 원하던 화가의 길로 마음 편히 들어섰다. 프랑스 남부의 액상프로방스는 그가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던 곳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인트 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20년을 그렸다는 믿기 힘든 설이 유력하다. 이 산을 그리다 비를 만나 폐렴에 걸리고 그것이 원인이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빅투아르 산과의 끊임없는 대화는 현대 추상의 문을 열어 주었다. 구, 원추, 원기둥, 이 세 가지 요소로 모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이것이 피카소에 영향을 주고 입체주의 탄생의 주춧돌이 된다. 그의 그림에는 세인트 빅투아르 산이 숨 쉬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전에도 계룡산을 40년 이상 그리고 있는 화백이 있다. 몇 년 전에 전시회에 갔다. 신현국이다. 그의 그림에서 반 고흐를 보고 세잔을 만났다. 계룡산과 한 참 이야기하였다. 산과 이야기하는 신 화백은 대가임에 틀림없다. 계룡산이 네모난 평면 속에 새로운 변환을 보여 준다. 그리고 새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세잔의 세인트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사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잔의 세인트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 [사진=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림일기부터 그려야 한다.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수박을 보고 그려야 한다. 수박을 통해 가족을 보고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다. 수박이 건초 더미가 되고 르왕 대성당이 되고 비뚤어진 테이블 위에 얼기설기 놓여 있는 사과가 되어야 한다. 논문은 그렇게 써야 하고 우리 인생이야기도 그렇게 그리면 좋겠다.

아이들을 미술관에 데리고 가서 이야기 시켜 보세요. 같이 이야기를 해 보세요. 현대 미술관에서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가지고 좋은 그림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다.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파리의 미술관들에서도 아이들이 그림을 그린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그린다. 아이들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볼까? 손들고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아이들 위로 선생님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다.

혹시 일부 학부모들이 이 글 같지 않은 글을 읽고 아이들 학원 보내기 취소하고 건초더미, 포플러, 사과, 성당 그리기를 아이에게 시킬까 겁난다. 아니면 학원에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까 두렵다. 아이에게 물어보세요. 무엇을 그릴까? 먼저 그려 보세요. 집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그려 보세요. 좋아하는 것,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그려 보세요. 그리면 이야기가 걸어 나옵니다. 세상에 관심 있는 모든 것이 이야기하는 세상에 살게 됩니다. 놀라지 마세요. 우리는 이렇게 살며 배우며 이야기하고 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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