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양한 KAIST 명예교수
벌써 한 40년 전이다. 햇병아리 조교수 시절에 가게 된 암스테르담은 낯설고, 화려하고, 복잡하고,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었다. 박사 학위 시절 썼던 논문에 관심을 가진 학술대회 임원 중 한 분이 논문 발표를 권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미국 병이 채 치료되지 않은 시절이라 서울, 대전에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이 낯설고 때로는 신경질도 났었던 것 같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일할 곳도 찾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던 차에 해외 학회 참가는 행복한 탈출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여비에 어울리는 암스테르담 어느 곳 허름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 먼저 인사하는 3층 구석방, 샤워가 있는 것에 감사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침대 용수철이 등을 누르는 곳이었지만 발표 준비에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도착한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부스스 한 모습으로 안내 데스크에 가서
"주말에 시간 보낼 곳이 있는지요? 박물관이나 공원이요."
"혹시 고흐 미술관 가 봤나요?"
"여기서 먼가요?"
"아니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렇게 우연히 고흐를 만났다. 과학기술만 알던 사람이 그림을 그렇게 만났다. 그 후 그림은 연구가 막힐 때마다 길잡이처럼 나타났고 결국은 내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인연이 되었다.
미술관은 엄청난 양의 스케치와 그림들로 가득했다. 고흐도 그리스 석고 뎃상 부터 시작? 천재도 연습을 한다! 우스꽝스러운 깨달음. 개그버전 유레카! 그는 왜 해바라기를 그렸나? 왜 초상화를? 고갱과의 관계는? 동생 태오는 어떤 역할을 하였나?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니? 늦깍이 화가의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나? 불과 10년 동안 800점의 그림과 1100점의 스케치를 남기다니?
이렇게 시작된 고흐 공부는 거의 40년 간 계속되었고, 두해 전엔 그가 마지막 1년을 보낸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방문하고, 동생 태오와 나란히 있는 담장이 넝쿨로 단장된 무덤, 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구릉, 그리고 꿈틀대는 성당, 그가 묵었던 동네 식당 2층의 작고 어두운 방을 보고야 고흐와 조금씩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화보에서, 인터넷에서 보고 책을 통해 공부하고, 미술관을 찾아 실물을 감상하고, 그 그림들을 그린 현장을 보고서야 그림이 이야기가 돼 가슴에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연구도 교육도 그리고 내 삶도 같은 과정을 거쳐 여물어 가고 작품이 되는 것을 알아 가면서 그림은 하나의 교훈이자 나침반이 되어 갔다.
이렇게 만난 고흐는 KAIST 교수 생활의 첫 걸음을 즐겁게, 또 무겁게 하였다. 미술 교육 한번 변변히 받지 못한 고흐가 불후의 명작을 남겼는데, "나도 하고 싶은 것 하면 된다!"는 생각이 교수 생활을 즐겁게 했다면, 내 작품이 고흐 것처럼 대작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내내 무거운 짐이었다. 고흐처럼 한 점의 그림도 제대로 팔지 못해도 훗날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니 평가에 연연하지 말자!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하자! 훗날은 내 몫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연말이면 적어 내야하는 논문의 개수, 현황, 상을 받는 동료 후배들에 어쩔 수 없이 비춰지는 내 모습. 고흐는 이럴 때 마다 입셍트를 마시고 그림을 그렸을까? 알 수 없다!
파리는 고흐에게 그리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벨기에 탄광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밀레의 영향을 받아 서민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컴컴하고 우울하다. 당시 유럽 화단을 휩쓸고 있었던 인상파의 화풍과는 달리 빛은 먼 곳에서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있을 뿐 이다.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한 고흐는 빛을 찾아 프랑스 남부의 아르로 간다. 유명한 노란 집을 만들고 고갱을 초청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꿈의 타운을 설계한다. 그러나 결국 고갱과는 틀어지고, 갖가지 소문만을 남기고, 노란 집은 더 이상 창조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귓불을 자르고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초상화를 그리곤 태오에게 난 괜찮고 멀쩡하니 생활비를 보내라는 편지를 쓴다. 그렇게 고흐는 태양을 머금은 14점의 해바라기를 남기고 아르를 떠난다.
빛을 그림에 초대한 인상파 이후 유럽의 그림은 원근법에서 빛으로 세상을 보는 화풍으로 바뀌어 갔다. 모네는 빛을 그리기 위해 수련을 연작으로 그렸고, 빛을 온전히 언제나 보기 위해 지베르니에 수련이 있는 정원을 꾸몄다. 그리고 그 곳에서 평생을 태양과 함께 지낸다. 나이를 먹으면서 백내장이 심해지고 잘 볼수 없게 되었지만 찌그러지고 흔들리는 빛과 생명을 이을 수 있는 마지막 은총으로 생각한 듯 그리고 또 그렸다. 모네가 고흐와 천상에서 만나 빛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빛은 고전적 원근법을 멀리 밀어 내었다.
고흐는 원근법으로부터 자유를 구했고 결국은 세잔,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의 입체파를 거쳐 추상을 안내하였다. 그림은 더 큰 자유를, 생각의 자유를 위해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꿔 나갔다.
그림은 자유를 준다. 자유는 새로운 연구를 성장시키는 토양이다. 이 자유 속에서 인류의 미래가 성장하고 있다. 이 자유로운 생각으로 내가 하는 연구, '음향학'을 다시 보고 그리고 싶었다. 음향학의 원근법, 인상파의 빛, 그리고 추상의 세계는 무엇일까?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미술관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렸던 미술관은 새로운 생각의 샘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까? 내가 보는 음향학은 무엇인가? 난 어떻게 새로운 음향학을 보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고 다차원 적으로 보아야 하고 가장 단순한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연구의 삼대 원칙을 어떻게 그림과 연결할 것인가? 가장 단순한 시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것은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미국 시카고 미술원 소장)라는 대작을 접하고 나서 조금씩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점으로 그린다? '빛의 삼원색' 원리를 이용해 점을 찍어서 표현한다? 끔찍한 작업시간이 필요 할 텐데? 세로가 2미터 조금 넘고 가로가 3미터 조금 넘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3년가량을 소비하였다니? 미련한가? 이러한 인내가 내 연구에는 있었는가?
점!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고 선이 쌓이면 면, 그리고 면이 쌓이면 체적이 된다! 점은 세상의 시작이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이 생각난다. 점은 공간에 어떤 위치를 표현하며 크기도 부피도 없다. 그리고 선은 점과 점을 연결한 것이고 면은 선을 죽 펼쳐놓은 것, 그리고 체적은 이런 면이 쌓인 것이다.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하였다. 그 시절에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는데, 아차!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던 기억!
"점은 면적도 부피도 없는 것이라 하셨는데, 어떻게 이 것이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체적이 되나요?"
가슴은 요동치고 좌불 안석. 선생님은 그러나 멋진 분이셨다.
"정의를 가지고 시비를 걸면 수학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후 내내 점은 세상의 기본이라는 신비한 원리가 날 사로잡고 있었는데, 점으로 그린 그림을 만난 것이다. 쇠라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점의 수학적 표현은 특이함수와 관계가 있다. 특이 함수를 이용해 연속체 역학을 해석하는 방법은 오래 전 이론이 정립되었다. 점, 면적도 없고 다만 위치만 표시하는 수학적 표현! 정말 특이하다. 이 특이함수를 기반으로 하고 컴퓨터의 도움으로 다빈치나 아인슈타인조차 어렵다고 고개를 저은 난류에 대한 해석도 가능한 시대다. 점 음원! 소리의 기본 단위를 점 음원으로 생각하고 특이 함수 이론을 접목하면 무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호이겐스 이후 모든 파동은 작은 점에서 발생하는 파동의 중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이론은 17세기부터 알려져 있다. 이 것을 소리에 적용하는 것은 어떨까? 결국 쇠라의 점묘법을 소리에 이용하는 셈인데 이미 쇠라가 이 것이 가능함을 밝혀 놓았으니 따라가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면서 학교 그리고 동네를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그저 점 생각만 하다 보니 세월은 뜀박질 치고 있는데, 난 마냥 고흐처럼 대단한 그림을 그릴 꿈을 꾸며 무수한 스케치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언 듯 주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진급심사에서 탈락! 어이쿠! 폼 잡다 한 방 맞았다. 고흐도 파리 살롱전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내색 않고 지내는 것에도 이력이 났다. 그러다 보니 교수가 화가 보다는 엄청나게 혜택 받은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조그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소리가 점에서 나는 소리의 합성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리는 그림은 오래 걸렸지만 나만의 길이라는 것이 지루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이 이론이 오래전에 음향학의 걸출한 대가에 의해 이미 제안되었고 또 이론적으로 잘 정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망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을 반도체 발달에 의해 출현한 매우 값싼 마이크로폰과 스피커, 그리고 빛의 속도로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의 능력과 결합하면 새로운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소리는 다른 표현이 되었다. 많은 마이크로폰을 이용한 음장 가시화(Sound Visualization)의 세상이 펼쳐졌고 또 다수의 스피커를 적절히 이용하여 원하는 소리를 원하는 공간에서 들을 수 있는 개인 음향 공간(Private Sound Zone) 개념이 정립되었다.
학회에서 발표하자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 이상하다는 지적! 그러나 고흐도 파리의 살롱에 그림을 걸지 못하였지 않은가? 이제 소리는 더 이상 모호한 인지 세계에 있는 물리량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면 볼수 있고 또 원하는 소리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한 것이 되었다. 수많은 스피커가 공간에 깔려 있는 별처럼 펼쳐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눈과 귀가 한 기관으로 변하고 소리의 공간감이 새롭게 구현되는 새로운 소리의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고흐, 세잔, 칸딘스키, 르노아르, 피카소, 등등 수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이 새로운 음향학의 세계를 열어 준 셈이다. 치열한 관찰을 통하여 새로운 생각을 하고 이 생각을 엄청난 연습을 통하여 구체화하고 이런 과정을 통하해 창작을 하는 연결 고리가 새롭다. 관찰, 연습, 창작의 세 기본 요소가 그림을 통하여 새로운 생각을 번쩍하게 한다. 그림은 공학을 아름답게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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