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컴퓨터과학과-IT 산업기능요원 10년
3無 선거운동은 '자신감'...코딩·SNS 능수능란
"세상 바꾸는 건 법·제도 아닌 과학적 진보"

과학·산업 전문언론 대덕넷(HelloDD.com)은 최근 '이준석 현상'을 연속 보도하고 있습니다. 특정 개인·정당을 넘어 그가 지닌 상징성 때문입니다. 실력주의, 관행·격식 파괴, 세대교체, MZ 세대 등장 등은 과학계와도 무관하지 않은 이슈라고 여겨집니다. 이준석 대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과학계와 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는 학창시절 절반을 과학도로 보냈고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IT 벤처창업을 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의 저서 『공정한 경쟁』에서 '이준석 현상'과 과학, 합리주의와의 연관성을 짚어봤습니다. [편집자 편지]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는 정계 입문 전 10년 이상 과학도로 지냈다. [사진=뉴스1·엔디소프트]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는 정계 입문 전 10년 이상 과학도로 지냈다. [사진=뉴스1·엔디소프트]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는 참모도 사무실도 대규모 홍보문자도 없이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기존 관행과 결별하며 그가 택한 전략은 디지털이었다. 이 대표에게 디지털 언어와 장비는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는 '자신감'의 영역이었다. 그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온라인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키워드를 시시각각 파악, 시의적절한 의제를 내놨다. 그가 '이준석 돌풍'을 새로운 정치 현상으로 부상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정계 입문 전 10년 '과학도 생활'

이 대표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평범한 직장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 이어 서울과학고를 진학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과학·경제학을 복수전공했다. 그는 정계 입문 전 10년가량 과학과 기술을 공부하며 '합리주의'를 체득했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그의 저서 '공정한 경쟁'에서 "제게 중요한 가치는 실용성이나 효용성 혹은 공정성, 한마디로 합리주의"라면서 "과학을 공부하면서 저도 모르게 제 몸에 밴 정신 같다"고 썼다.

그가 과학도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건 서울과학고 시절부터였다. 그는 학생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삼성과 협상을 벌여 컴퓨터를 학교에 가져왔다고 한다. 하버드대 진학 당시 작성한 에세이 두 편도 과학·공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삼성과 협상 경험, '공학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두 가지 내용이었다. 그의 저서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저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과학적인 진보라고 봐요. 그래서 중국에서 과학을 실용적으로 응용하는 사람들인 공학도가 정치의 주류로 부상한 것이 필연적인 결과라고 봅니다. 물론 문화혁명이라는 특수한 정치적인 상황이 있었지만요. 저는 한국의 정치는 율사들의 카르텔이 정치 발전을 막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정치판은 다양성을 상실한 집단이에요. 저는 중국의 급성장은 실용적인 공학도가 나라를 운영하는 것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는 우리나라 정치 수준도  과학·공학적 높이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율사가 너무 많아요. 그들은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들인데, 그것만으로는 그다음 단계가 뭔지 말할 수가 없어요.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율사들은 실제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요. 그들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직업이니까요. 공학은 성과를 내려면 뭐든지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공학적인 사유가 정치하는 데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 국내 복귀 → IT 교육봉사 → IT 벤처창업 목표 → 정계 발탁

이 대표가 취임 연설에서 강조한 핵심 키워드 '공존'과 '다양성'이다. 이런 가치관은 과학도 시절 만들어졌다. 이 대표는 KAIST 수리과학과를 입학하고 첫 학기 만에 중퇴한 뒤 하버드대로 입학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모두 경험하며 '다양성'에 차이가 있다고 봤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페이스북 창업자와의 만남을 꼽았는데, 미국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가 한국에서 KAIST를 잠시 다녔어요. 그곳 기숙사 각층에 TV가 있었는데 채널 때문에 싸우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취향이 똑같았다는 겁니다. 이게 한국 학생들의 단점인데, 저는 이런 획일성이 아주 문제라고 봐요. 하버드대 기숙사에서도 TV가 한 대씩 있었는데 방마다 채널이 달랐어요. 이런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페이스북이에요. 전공도 역사학, 심리학, 디자인 등 다양한데 겉으로는 이들이 섞여 무슨 일을 할까 싶겠지만 그들이 의기투합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거죠. 컴퓨터를 다루는 단순 코딩 실력은 서울과학고, KAIST 출신들이 하버드대 친구들에 비해 월등해요. 한 20배 정도 생산성이 뛰어날 겁니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배경은 '나라의 특별한 혜택을 받았으니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군 복무를 IT 산업 기능 요원으로 대체했다. 당시 월급 250만원을 받으며 군복무를 하면서 교육 봉사를 시작했다.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란 교육 봉사 단체는 현재도 운영 중이다. 

이 대표는 그의 저서에서 "전공을 살려 IT 분야에서 승부를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IT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저나 사회에 유익한 일이라고 믿었다"고 썼다.

IT 벤처창업을 생각하던 이 대표는 28살 나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발탁,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는 지니어스 등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정부 외곽에선 쓴소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대표는 10년 이상 과학을 공부하며 객관적·합리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이 대표 취임 이래로 과학계에서도 나이·연공 서열이 아닌 공정한 경쟁, 실력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시스템을 재구성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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