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연구 현장 방문
과학화·철학화의 길로 건너가 사유 능력 키워야
세계질서, 패러다임 급변...한국 선도국 도약 기회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강연 하이라이트. 분량 4분 30초. [디자인·편집=고지연 디자이너, 촬영=김인한 기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20일 연구 현장을 찾아 역사 이야기를 꺼냈다. 아편전쟁. 최 교수는 1840년 아편전쟁을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패배,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완전승리로 정의했다. 철학자의 시선에서 동서양 승패를 가른 지점은 '과학'이었다. 

"중국은 과거 청나라 말까지 세계 총생산량의 32~34%를 했어요. 지구상에 이런 제국은 없었어요. 그런데 중국이 아편전쟁 때 서양에 무너집니다. 중국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망했나. 생산력의 차이예요. 중국이 만든 세계 최초는 화약, 나침반, 비단, 도자기 이런 것들은 기술적 산물이에요. 그런데 인류 문명은 이미 과학화의 길로 나가고 있었어요. 서양은 과학이 생산 영역에 직접 관여할 정도로 진화했는데, 동아시아는 기술 레벨에 갇혀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동아시아에는 기술자까지만 있었고 과학자가 없었다는 얘기예요." 

그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과 직결되고,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한 도구를 '지식'이라고 정의했다. 지식과 학문에는 각기 높낮이가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상하는 학문일수록 '시선의 높이'가 높다고 했다. 최 교수는 시선의 높이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과학적·철학적 사유로 상승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최 교수는 그의 저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서 시선의 높이를 정의한다. 

'전체를 못 보고 넓게도 못 보는 이유는 넓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높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산을 전체적으로 다 보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산보다 훨씬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산과 나란히 서 있다가는 산 옆구리만 조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시선의 높이를 끌어올릴수록 전체를 넓게 보는 능력도 올라갑니다. 각자 시선의 높이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건너가기'는 사실 도약이나 상승처럼 높아지는 일입니다.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입니다.'

◆"일본, 중국은 서양을 배웠지만, 한국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맺는데, 제1조가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이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정치의식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예요."

최 교수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은 서양을 이겨보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조선은 지식인 사회에서 역사적 의식이 없었다고 진단했다. 서양을 이겨보겠다는 다짐은 과학화, 철학화 매진으로 발현됐고, 조선과 대한민국은 아직 이 길에 접어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패배를 당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복수심이에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정신 승리법'에 취한 사람이 패배하면 복수심마저도 없어요. 임진왜란이 치욕인 이유는 임진왜란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도 조선 어디에서도 복수전을 생각조차 안 해요. 일제 36년 식민지를 경험하고도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복수를 꿈꾸지 않아요. 한탄과 분노만 하고 있어요. 의식이 없이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에요. 이겨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무의식적 정신승리는 임진왜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이 의식 상태에서 과학이고 철학이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중국과 일본은 공통으로 서양을 배우자고 했어요. 대한민국은 치욕을 반복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데, 치욕을 당한 국가를 배워보자는 의식은 이 땅에서 한 번도 없었어요. 복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상대를 배우지 않아요. 

일본, 중국, 한국 사이에 국력의 격차는 철학과 과학을 받아들인 기간 차이만큼 격차가 나요. 중국과 일본은 근대를 과학화, 철학화의 길로 매진해요. 그래서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에 기술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나라를 과학적 세계관으로 재무장하는 나라로 다시 깨워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일을 해야 할 조선, 대한민국은 식민지를 경험했어요. 식민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과학화, 철학화의 길을 아직 못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데올로기 논쟁은 있는데, 철학, 과학, 가치, 의미 논쟁은 아직도 없어요.  아직까지 대한민국 논쟁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논쟁은 제도 논쟁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과학자들이 중심이 돼서 과학적 사유능력, 과학적 삶의 태도로 끌어올려서 제도 논쟁을 벗어난 과학, 가치, 의미 논쟁으로 끌고 가지 않으면 우리는 다양한 제도 논쟁만 평생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희망은 없나?

최 교수는 과학화·철학화의 길로 매진해 시선의 높이를 끌어올리는 일만이 국가 생존에 필요한 힘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1820년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대분기(Great Divergence)때 만들어진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 등 세계 질서가 깨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세계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과학적 높이로의 시선 상승과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역사적으로 1820년을 대분기라고 해요. 그때 국제 질서가 잡힙니다. 그때부터 추격국가와 선도국가의 교체는 없었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얘기입니다. 한 번 자리가 잡히면 교체가 안 된다는 것. 그런데 기적을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선진국 가까이 간 유일한 나라에요. 

과거 대분기 때 만들어진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어요. 물건을 만드는 방식이 전혀 달라진다는 의미에요. 대한민국이 선도국가를 이루고 싶다는 꿈이 있다면 지금밖에 찬스가 없어요. 그런데 이 찬스가 왔을 때 국력이 제일 강할 때에요. 국가 포트폴리오는 완벽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정신을 차리면, 이 한반도 안에서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꿈. 선도국가의 꿈을 이뤄낼 수 있어요. 고조선의 꿈을 다시 이룰 수 있어요. 지금밖에 찬스가 없어요. 

이때 발휘해야 할 능력이 뭐냐, 기능 능력이 아니에요. 기술 능력이 아니에요. 과학 능력이에요. 세계는 과학적 레벨로 이미 진화한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과학자들의 정치의식,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학적 높이로 의식이 깨어있지 않으면,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계에 적응할 수도 없고 주도권을 잡을 수 없어요.

제가 여기 온 건 한가지 소명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건너가야 한다, 도약해야 한다, 왜 도약해야 하느냐. 더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세상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의식이 깨어있지 않으면 멈춰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너가야 합니다. 건너가는 높이가 과학적 높이입니다. 과학자들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지는 시대가 됐습니다."

이날 열린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연기협) 조찬포럼은 지난 4월 박성진 POSCO 산학연협력실장 발표를 시작으로, 5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강연으로 이어졌다. 3번째 조찬포럼은 다음 달 22일 개최될 예정이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20일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연기협) 조찬포럼에서 '선도국가를 위한 과학자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김인한 기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20일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연기협) 조찬포럼에서 '선도국가를 위한 과학자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김인한 기자]

◆질의응답

Q. 영끌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젊은 세대는 경계에 서 있어요. 두 가지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는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또 하나는 어떤 야망을 가졌느냐. 저는 이 두 가지로 젊은이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했다고 봐요. 젊은들의 분노는 애 일자리가 없느냐 이거에요. 그런데 정치인들이 일자리가 없는 현실은 젊은이가 만든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요. 사회 구조 문제나 어떤 사람의 문제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모든 젊은이는 세상에 태어나면 어떤 문제에 직면했어요. 어떤 젊은이는 태어나보니 나라가 없었어요. 그때 젊은이들이 나라가 없냐고 항의 안 했어요. 나라를 찾으려고 나갔어요. 어떤 젊은이는 먹을 것이 없었어요. 그때 젊은이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항의 안 했어요. 먹을 걸 만들어냈어요. 어떤 젊은이는 태어나보니깐 국가에 폭력이 일상화돼서 그것과 싸웠어요. 어떤 젊은이는 일자리가 없어요. 일자리가 없는 건 분노할 일이 아니라 모두 힘을 합쳐서 해결할 일이에요.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젊은이의 역할이에요. 그러면 지금 일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고, 규제를 줄여줘야 해요. 

젊은이들 영끌, 어느 사회나 영끌해야 하는 것들이 달랐어요. 지금은 자산하고 소득하고 구분을 못 해요. 자산에 세금을 매기고 소득에도 세금을 매기고,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영끌하는 거예요. 젊은이가 자기 욕망과 꿈을 실현할 공간을 기성세대가 만들어줘야 합니다. 

조선시대 젊은이들이 제일 많이 한 건 공무원 시험 준비였어요. 조선시대에 공무원 시험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요. 근대 시기에 일본 젊은이는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 나라, 서양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에선 밀항이 유행했어요.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예요. 그래서 젊은이들한테 영끌을 하느냐 뭘 하느냐 말하기 전에 과감하게 자기 야망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교육을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봅니다. 

지금도 젊은이들 교육하는 방식이 조선시대에서 탈피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훈계만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덕담 한마디를 요청받았어요. 저는 덕담 안 한다고 했어요. 젊은 세대들에게 제가 말하는 덕담이라는 건 의미가 없고 제 덕담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젊은이들은 젊은이 스스로에게 드러나는 욕망을 마음껏 펼치면서 사는 용기만 있으면 돼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덕담을 구하지도 말고 원하지도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요. 이미 정해진 기능적인 대답에 빠지지 말고 자기가 자기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Q. 탈원전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과학계 내부에서도 첨예한 정치 대립이 있는데 차원을 높여야 하지 않겠나. 대화 방법론에 대해 조언한다면.

제가 생각할 땐 대화 방법론을 익혀서 대화가 제대로 되는 경우도 거의 없어요. 원자력에 대해서 대화를 하려면 우리 문명이 어디까지 왔는지, 원자력이 무엇인지, 왜 원자력을 만드는지, 국가에서 원자력을 왜 만드는지를 알아야 해요. 정치적 맥락보다 높은 과학적 맥락에서 정치적 대화가 이뤄져야 하는데, 정치와 이념에 철저한 상태에서 과학적 대화를 하려고 하니깐 안 되는 거예요. 

과학적 인식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대화를 거기에 종속시켜야 해요. 정치적인 대화를 종속시키려면 과학적 인식이 철저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유식해야 한다는 것. 유식하려면 국가가 무엇인지, 에너지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이 있고 나면 그 대화가 효율성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무엇인지, 에너지가 무엇인지, 문명이 어디까지 왔고 앞으로 어디로 갈지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면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논쟁이 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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