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영기 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소장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지난해에 이어 사스코로바이러스-2(SARS-CoV-2)의 과학적 이해와 극복 방안 모색을 위한 '코로나19 과학 리포트 2'를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최근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이러스 변이와 백신‧치료제 개발 관련 연구동향과 쟁점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IBS 과학자들과 국내 전문가들이 전달하는 최전선의 지식과 정보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19) 종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과학 리포트2 바로가기> |
◆축적된 기초연구 지식이 Disease-X를 막는다
아마 이제는 초등학생도 코로나19의 원인체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만큼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어떤 존재일까?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라는 근본적 질문에는 답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교과서적인 답은 아래와 같다.
"동물‧식물‧세균 등 살아있는 세포에 기생하고, 세포 안에서만 증식할 수 있는 미생물. 크기는 20~400nm(나노미터)이고, 병원체(病原體)가 되는 것도 있음. 보통 RNA, DNA 등 핵단백질을 주요 성분으로 하며, 생물의 체세포에 대한 친화성이 매우 강함."
이 추상적인 문장을 조금 더 친절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까? 만약 필자라면 "바이러스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살아있는 생명체지만 홀로(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가장 우리를 닮은 생명체"라고 표현할 것이다.
◆ 위험 바이러스는 약 50만 종, 인류가 밝혀낸 건 0.2%뿐
바이러스는 숙주에 매달려 비겁하지만 치열하게, 우리와 같이 있으려 노력한다. 바이러스는 항상 우리의 곁에 존재한다. 다만, 바이러스가 너무 욕심을 부려 빨리 증식하려 하면, 감염된 숙주가 병들거나 죽음에 이른다. 궁극적으로는 바이러스 자신도 증식을 이어갈 수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욕심을 내려놓고 숙주를 적당히 이용한다면, 숙주와 함께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가 그 대표적 예다.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사스)이 발생했을 때, 철저한 방역에 막혀 바이러스는 인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감염 숙주도 찾지 못했다. 결국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는 기록만 남기고 사라졌다. 반면, 1918년 나타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2021년 현재도 독감 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무서운 생명력이다.
에이즈, 에볼라, 인플루엔자, 사스,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바이러스성 질병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는 전체 병원성 바이러스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다. 조나 마제트 미국 데이비스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 교수에 의하면, 위험한 바이러스는 약 50만 종이 넘지만 인류가 병원성을 규명한 것은 겨우 0.2%뿐이라고 한다.
최근 판데믹을 일으키고 있는 많은 질병의(1918년 스페인독감, 2009년 신종플루, 2009년 코로나19) 원래 바이러스는 동물 곁에만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도시화가 큰 변화를 낳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이 사람과 접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동물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감염숙주(인류)에 잘 적응하여 생명력을 이어가지만, 또 다른 일부는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가까운 미래에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경고하는 것만 10종 이상이다. 이들 중 다수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인류는 앞으로도 계속 바이러스로부터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 영국, 호주, 중국 등은 이미 국가가 지원하는 바이러스 전문 연구기관을 다수 운영하고 있다. 최근 뉴스를 통해 많이 접한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영국 국립바이러스센터(National Virology Center), 호주 도허티연구소(Dohergy Institute) 그리고 중국 우한바이러스연구소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보건복지부(국립감염병연구소), 농림축산식품부(농림축산검역본부), 환경부(국립야생동물질병관리원) 등 정부 부처 산하의 다양한 연구기관들이 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대부분 이미 발생하여 문제가 되는 바이러스 질병을 막기 위한 연구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예: 현재의 SARS-CoV-2, 아프리카돼지열병, 고병원성의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질병 등). 즉 당면 현안 해결에만 집중할 뿐, 미지의 바이러스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노력은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알던 질병에 대한 기존 상식은 하나하나 깨지고 있다. 코로나19가 특히 그렇다. "호흡기 질병은 보통 겨울철에 발생하여 더운 여름철에는 거의 사라진다"든가 "팬데믹 전에는 어느 정도 인체 간 감염이 발생하여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등의 기존의 정설을 무너뜨렸다. 게다가 변이 바이러스의 발생도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접근 및 병인기전에 대한 기초지식 축적이 더욱 요구된다.
◆ 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의 출범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2개의 연구센터로 구성된다. 필자가 이끄는 '신‧변종 바이러스 연구센터'는 다양한 신‧변종 및 인수공통 바이러스의 병인기전을 규명하고, 신규 진단기법 및 치료기술 개발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신의철 센터장이 10월부터 이끌 '바이러스 면역 연구센터'는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반응 및 면역병리 기전을 밝힐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플랫폼의 바이러스 발생 예측‧제어 기술을 연구할 새로운 센터의 출범도 계획하고 있다.
◆ 바이러스는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
안타깝게도 바이러스 연구는 평상시에는 인기가 없다. 이번 코로나19처럼 바이러스성 질환이 창궐하는 예외적 경우에만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다. 그래서 연구비도 적고, 연구 특성상 실험과정에 위험도 따른다. 우리나라에 바이러스 연구자 수가 매우 적은 이유다. 언젠가 필요하지만, 언제나 필요한 필수품 같은 학문은 아닌 것이다. 백화점의 특별전 혹은 매장 한구석에 놓인 구색 맞추기용 전시 상품 정도로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바이러스성 질병은 한번 발생하면 모든 사회‧경제활동을 마비시킬 정도의 재난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바이러스 및 질환 극복 연구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다만 질병에 대한 기초지식은 단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중장기 전망에서 젊은 연구자들을 꾸준히 키우고 지원해야만 해외처럼 우수한 연구자 풀을 만들 수 있다. 아울러 공들여 키운 연구자 풀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미래에 다가올 미지의 감염병, Disease-X에 대한 국가 경쟁력 확보 및 백신주권 확립을 기대할 수 있다.
◆ 소화기를 만드는 장인의 심정으로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화재 진압에 쓰는 소화기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 맺힌 작업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힘들게 만든 소화기가 불을 끄는 데 사용되기보다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고 폐기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왜 발생 가능성도 낮은 질병의 기초연구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연구비를 쓰냐고 물을 수도 있다. 우리 연구의 목적은 질병 탐구를 치료제와 백신 개발로 이어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가 한 번도 쓰이지 않고 기한 만료로 폐기될 수도 있다. 그러면 잘못된 예측에 따른 투자로 혈세를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보다는 백신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큰 위협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이해되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바이러스 연구는 어쩌면 국가를 지킬 소화기를 만드는 기술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팬데믹 이후를 준비해야 할 때다. '위드 코로나', 즉 바이러스와 공존하더라도 최소한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는 올라야 한다. 또한 코로나19처럼 아무 준비 없이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에 당하는 우를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많은 국민들이 연구소 출범에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셨다. 신‧변종 바이러스 질환과의 전쟁은 이제 본격화되었다. 얼마나 길어질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우리는 축적된 기초연구 지식을 무기로 삼아 전쟁의 선봉에 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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